2026년 8월 6일 (목)
(백)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예수님의 얼굴은 해처럼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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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우 신부님_김건태 신부님_조욱현 신부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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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석 [wsjesus] 쪽지 캡슐

2026-08-05 ㅣ No.191004

이병우 신부님_"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마태15,28)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되자!'

 

오늘 복음(마태15,21-28)은 '가나안 여자의 믿음'이 전해지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방인 지역인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물러가셨을 때, 그 고장에서 가나안 여자가 나와 예수님께 간절히 청합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었습니다."(마태15,22)

 

그런데 놀랍게도 자비하신 예수님께서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더 나아가 제자들은 예수님께 다가와 이렇게 말합니다.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마태15,23)

그제야 예수님께서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마태15,25) 하고 대답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대답 이후 이어진 가나안 여자와 예수님과 대화는 이렇습니다.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마태15,25)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마태15,26)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태15,27)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마태15,28)

 

누가 이런 믿음을 간직할 수 있을까?

참으로 큰 믿음입니다.

가나안 여자는 큰 무시와 모욕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강아지 취급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간절함'과 '확신과 믿음' 때문입니다.

자기 딸을 살리고자 하는 '간절함'과 예수님께서 자기 딸을 구원해 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확신과 믿음'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목적이 분명하고, 그 목적을 이루려는 간절한 마음이 있으면 쉽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데 있어서 반드시 만나게 되는 크고 작은 장애물들 앞에서도 넘어지지 않고, 그 장애물들을 넘어 목적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그 목적을 이룹니다.

 

'신앙인의 목적'은 '이제와 영원한 부활'입니다.

'지금 여기에서도 살고, 저 세상에서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신앙인으로서 지금 여기에서 죽지 않고 살아있는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저는 그것이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곧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

 

우리의 목적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이 목적을 항상 잊지 말고 기억하면서, 이제와 영원한 부활을 향해 나아갑시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여러 가지 기도와 신심행사에 열중하고 육신의 많은 극기와 고행을 하면서도, 자기에게 해가 될 듯한 말 한마디만 듣거나, 혹은 어떤 것을 빼앗기기만 하면 발끈하여 내내 흥분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진정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미워하고 뺨을 치는 사람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성 프란치스코의 권고 14, 마음의 가난)

 

(~ 집회51,30)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김건태 신부님_모든 이를 위한 식탁

 

오늘 예수님은 티로와 시돈 지방을 방문하십니다. 이 지역은 페니키아(지금의 레바론)의 해양 도시들입니다. 율법은 이교도 지역을 방문하거나 이교도를 만나는 행위를 철저히 금하고 있기에, 예수님은 분명 율법을 어기고 계신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구원 대상에 이교도라 해서 제외될 수 없다는 신념에서 이와 같은 행위를 보이신다고 할지라도, 오해를 불식시키거나 쓸데없는 잡음을 차단하기 위한 차원에서, 가나안 부인의 청 앞에 처음에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의 간절함이 이러한 오해와 잡음의 영역을 무너뜨리고 맙니다.

 

“호되게 마귀가 들린 딸”을 둔 이교도 여인이 소문을 듣고 찾아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하고 청합니다. 청하기에 앞서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으로 부름은 예수님의 치유 능력에 대한 고백과 아울러 치유에 대한 간절한 소망을 담고 있는 몸짓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응답은 다소 충격적입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우리에게 ‘강아지’라는 표현은,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이 손자들을 가리켜 ‘우리 강아지’라고 할 정도로, 귀여움과 친밀함의 대명사로 자리하고 있지만, 예수님 시대의 강아지는 그야말로 ‘개의 새끼’라는 사전적 의미로 사용되었을 뿐입니다. 따라서 ‘자녀들’을 이스라엘 백성으로 해석한다면, ‘강아지들’은 이교도들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교도들을 멸시하는 표현이며, 구원의 대상은 오로지 이스라엘 백성뿐이라는 전통적인 유다교 사상을 반영하는 말씀으로 이해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에 대한 이교도 여인의 반응은 지극히 상식적이면서도 딸의 치유에 대한 간절함을 강렬하게 드러냅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예수님을 다시 한번 ‘주님’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주님’(그리스어로 ‘퀴리오스’)은 본디 하느님의 고유한 이름 ‘야훼’를 대신하여 사용되던 표현입니다. 복음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초대 교회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주님’이라는 신성한 칭호로 부름으로써, 그분은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하느님 아버지와 똑같은 권능과 영예와 영광을 받으실 분이심을 고백하기 시작했습니다. 다만 여기서는 이교도의 입에서 주님이라는, 신앙고백적 호칭이 두 차례에 걸쳐 발설되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입니다. 이 신앙고백으로 이교도 여인의 기도는 청허되며, 이 여인을 포함한 이교도들도 주님의 식탁에 앉을 자격이 부여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보다 먼저 제자들이 확인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뒤를 이어 세상 어디에나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할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마음을 관조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부모의 마음을 살펴보는 일일 것입니다. 자녀를 위해서라면 못 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그 마음, 오늘 이교도 여인이 생면부지의 예수님께 보여드린 그 마음 말입니다. 그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 곧 주님의 마음을 움직였고, 여인의 딸은 악령의 그늘에서 벗어나는 은총을 입습니다.

 

오늘 하루, 만나는 모든 이에게 주님의 마음으로 다가서, 우리를 통해 그들이 주님을 만나고 체험할 수 있도록 힘쓰는, 소중한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조욱현 신부님_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오늘 복음은 이방 여인의 믿음을 통해 참된 기도의 자세와 구원의 보편성을 우리에게 드러낸다. 가나안 여인은 애원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처음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 장면을 이렇게 해석한다. “주님의 침묵은 거절이 아니라, 그녀의 믿음을 더욱 불타오르게 하려는 의도였다. 마치 스승이 제자의 갈망을 시험하듯이.”(Homilia in Matthaeum 52 재해석) 우리 삶에도 하느님께서 침묵하시는 순간이 있다. 그러나 그 침묵은 외면이 아니라, 더 깊은 신뢰로 우리를 이끄는 시간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26절)라고 하신다. 당시 유대인과 이방인의 경계를 드러내는 강한 표현이었다. 그런데 여인은 분노하지 않고 오히려 이렇게 응답한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27절)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 말을 두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녀는 겸손 안에서 승리하였다. 교만은 하늘에서 천사를 끌어 내렸으나, 겸손은 이방 여인을 은총의 자녀로 들어 올렸다.”(Sermo 요약) 겸손은 은총을 끌어들이는 열쇠이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스스로 낮아질 때, 그분은 우리를 높여 주신다.(루카 14,11 참조) 

 

예수님은 마침내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28절)라고 말씀하시며 그 딸을 치유해 주신다. 이는 구원이 유다인만이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열려 있음을 드러내는 순간이다. 성 바오로 6세는 이렇게 가르쳤다. “교회는 민족, 인종, 문화의 장벽을 넘어 모든 이에게 열린 보편적 성사이다.”(교회 13항 요약) 오늘 복음은 교회가 모든 이들에게 열린 집임을 다시금 상기시킨다. 

 

가나안 여인의 믿음은 우리에게 중요한 몇 가지 메시지를 준다. ★끈질긴 기도의 모범이다. 응답이 더디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하느님께 매달리는 기도의 자세를 말한다. ★타인을 위한 중재이다. 그녀는 자기 자신이 아니라, 딸을 위해 기도했다. 우리 역시 가족, 사회, 교회를 위해 끊임없이 중재해야 한다. ★겸손의 길이다. 하느님 앞에서 우리는 권리가 아니라, 은총을 구하는 존재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말한다. “믿음은 하느님께 매달리는 끈질긴 용기이며, 은총은 겸손한 이들의 마음을 통해 흐른다.” 

 

가나안 여인의 믿음은 우리에게 침묵 중에도 포기하지 않는 기도, 겸손한 마음, 그리고 구원의 보편성을 가르쳐 준다. 우리도 매 미사 때 이렇게 고백한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이 고백 안에 가나안 여인의 겸손과 백인 대장의 믿음이 담겨 있다. 우리가 이 겸손한 믿음을 지닐 때, 주님께서도 우리에게 말씀하실 것이다. “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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