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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남터순교성지” 의 새남터 지명의 유래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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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명 [kntm103] 쪽지 캡슐

2026-08-05 ㅣ No.233836

  “새남터순교성지 의 새남터 지명의 유래에 대하여

새남터1840년대 고산자 김정호(古山子 金正浩)가 편찬한 지도에도 사남기(沙南基)로 나오는 조선시대에는 유명한 지명이었으며 한강변중에서 모래밭이 제일 크고 넓게 발달한 곳이다. 새남터는 세모래()와 나무()가 많은 곳()을 이두식으로 표기한 것이고, 지금의 한강과 한강변의 지형은 100년전과는 조금 다르다. 1960년 이후 한강 치수사업을 통한 많은 개량으로 지금의 형태로 변하였다. 한강대교가 개통되기전에는 한강을 건너려면 비변사에서 관리하는 노량진에서 배를 타야만 했는데 지금의 한강대교가 놓인 자리가 그 뱃길이다. 남대문에서 출발하여 최단거리에 있는 나루가 노량-지금의 한강대교 북단이며 한강중에서 유속이 가장 느리고 강폭이 좁은 곳이어서 정조(正祖)대왕이 수원으로 행차할 때 배다리를 놓았던 곳이다. 한강대교 남단 지하철9호선 노들역 인근에 정조대왕이 땀을 식히던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이 있는데 노량진과 같이 비변사(備邊司)에서 관리하였다.

  새남터의 세모래의 앞글자가 변한 것이다. 새남터는 한강의 유속이 동작대교 부근에서부터 급격히 느려지면서 모래가 퇴적되어 수심이 낮아지고 모래사장이 길고 넓게 퇴적하게 되어 지금의 서부이촌동을 만들었고 한강변중 강모래가 제일 많았다. 아마도 서부이촌동의 아파트를 재건축한다면 모래는 무진장 확보한 셈이다.

  새터의 나무는 숲보다는 새남터의 넓은 모래사장에 건조 또는 적치된 건축용 목재 또는 화목이었다. 한양의 인구가 늘면서 건축용 목재와 화목등 목재의 수요가 늘었는데 한양 인근의 산은 건축용으로 사용할수 있는 나무가 드물었고 조선말에 찍은 서울의 사진을 보면 대부분 민둥산이었다. 서울에서 소비하는 목재의 주요 공급처는 북한강과 남한강 수계의 강원도와 충청도였다. 두 강의 상류에서 원목을 뗏목으로 만들어 강에 뛰우면 강물의 유속이 느려진 새남터앞 강변에 힘들이지 않고 모였다. 또한 강물에 띄운 목재는 새남터의 수심이 낮고 넓은 모래사장으로 손쉽게 뭍으로 올려지고 새남터의 넓은 모래밭에서 건조되었으며, 통나무나 판재() 또는 장작으로 가공되어 삼남로를 따라 남대문과 서소문을 통과하여 도성으로 공급되었다. 노량나루에서 새남터 당고개 청파 남대문 서소문 서대문으로 이어지는 삼남로는 도성으로 이어지는 경사가 거의 없어 무거운 목재를 대량으로 운반할 수 있는 유일한 도로였다.

  그런데 왜 새남터가 처형장이 되었을까?

조선에서는 처형장의 조건을 첫째 많은 군중이 모일 것, 둘째 흐르는 강물이 있을것이었는데, 새남터는 조선 최대 최장의 강이 흐르고,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의 사람들이 상경이나 낙향할려면 반드시 삼남로의 새남터를 거쳐야 하며 또한 새남터에는 목재를 가공하고 사고 파는 사람들이 북적이는 목재시장이었을 것이니 국법의 지엄함을 대중에게 각인 시키는 최적의 장소였던 것이다.

그런데 새남터는 죽을죄를 지었다고 아무나 죽는 장소가 아니었다. 양반중에서도 고관대작 사대부라야 새남터에서 처형되었다. 대표적으로 1456년에 사육신의 처형이 새남터에서 있었고, 수많은 가톨릭 신자들의 순교가 있었으나 새남터에서 순교한 가톨릭 신자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을 포함한 11분의 신부님과 지도자급 평신도 3분이 전부다. 일반 평신도는 서소문밖사거리와 당고개에서 순교하였다.

나는 우리나라 3대 순교성지를 새남터, 서소문밖사거리, 당고개를 꼽겠는데 그중에 제일은 새남터이며 예루살렘의 골고다언덕에 버금가는 순교성지라고 하겠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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