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ㅣ세계 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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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1791년 윤지충의 거상에 대한 사족의 반발과 원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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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1년 윤지충의 居喪에 대한 士族의 반발과 원인 1. 머리말 2. 윤지충 居喪의 불완전성 3. 士族의 반발과 宗法의 不在 4. 맺음말 국문 초록
본고는 1791년 윤지충의 거상을 고찰하고 그 성격을 종법적 측면에서 분석하여 당시 사족들의 반발 원인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윤지충 거상에 관한 관찬과 사찬 기록에 따르면 그는 상복을 온전하게 입지 못하고 전을 올리지도 않았다. 아울러 조문객에게 곡을 하면서 응대하지 못하였고 장례를 늦게 지냈다. 그뿐만 아니라 윤지충은 신주도 만들지 않았다.
반면 윤지충이 유교 상례 규정에 맞게 실천한 부분도 있는데, 그는 소렴과 대렴을 하고 장례에 쓸 관곽을 마련하였으며, 무덤을 유교 상례 규정에 맞게 만들었다. 규정에 맞게 실천하지 못한 것과 실천한 점을 고려하면 윤지충의 거상은 대체로 유교 상례 규정에 맞지 않은 불완전한 거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사족들은 단독 또는 집단으로 반발하여 사족 사회에 통문을 돌리거나 조정에 상소하였다. 이들은 이 사건을 예의의 나라인 조선의 근간을 흔들 만한 사건이라 판단하였다. 본고는 이들의 반발 원인이 종법의 부재에 있다고 보았다. 윤지충의 거상에서 시행되지 않은 전, 상복, 조문, 신주는 유교 상례 절차와 종법의 기능에 있어 중요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그가 상복을 간략하게 입거나 전을 올리지 않은 점은 유교 상례 절차의 미준수를, 그가 조문을 받지 않고 신주를 없앤 것은 적장자의 조상 숭배와 친족들의 결집이라는 종법 기능이 부재함을 뜻한다.
일반적으로 당시 조선의 사족은 일상에서 유교 의례를 실천하여 식자층으로서 혹은 지배층으로서 여타 계층과 자신들을 구분하고자 하였다. 이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집단을 결속하기 위해 유교 의례의 규정을 준수하였고, 유교식 종법에 기반한 사회 질서를 확립하였다. 이에 천주교 신자이자 사족인 윤지충의 불완전한 거상은 조선 사족의 정체성과 집단의 결속력을 흔들 만한 일이었다.
[교회사 연구 제63집, 2023년 12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김진우(한국유교문화진흥원 한국예학센터 전임연구원)] 파일첨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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