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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란도란글방/ 마귀를 대적하라 (에페6,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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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21-11-09 ㅣ No.150883

 

 

(공동번역성서) 2021. 11. 9. 도란도란글방

 

 마귀를 대적하라 

 

(에페6,10-13)

10 내가 끝으로 여러분에게 권고할 말은 이것입니다. 여러분은 주님과 함께 살면서 그분에게서 강한 힘을 받아 굳세게 되십시오. 11 속임수를 쓰는 악마에 대항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주시는 무기로 완전무장을 하십시오. 12 우리가 대항하여 싸워야 할 원수들은 인간이 아니라 권세와 세력의 악신들과 암흑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의 악령들입니다. 13 그러므로 지금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무장을 하십시오. 그래야 악한 무리가 공격해 올 때에 그들을 대항하여 원수를 완전히 무찌르고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몇 번에 걸쳐서 마귀가 우리 성도들을 어떻게 공격하고 있는지에 관해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러한 마귀의 공격에 대해 공부를 하면서 한 가지 확실하게 해 둘 것은 마귀가 우리를 공격해서 얻는 유익이 무엇인가?다시 말해서 우리는 마귀의 공격을 통해 어떤 손해를 보게 되는가?’입니다.

구원이 상실됩니까? 아니지요? 마귀는 우리 성도들을 공격해서 그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감격과 기쁨을 빼앗고 자녀로서 가져야 될 자신감을 빼앗음으로써 마땅히 맺어야 할 열매를 못 맺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마귀의 속임수를 잘 분별해서 대처하지 않으면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서도 늘 불안하고 외롭고 슬프고 낙심하며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은 죄책감(罪責感)에 대해서 공부를 해 볼까합니다.

마귀가 우리 성도들을 제일 많이 공격하는 부분이 바로 이 죄책감(罪責感)의 부분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래서 성도라는 사람들이 그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성도로서의 기쁨을 누리기는커녕 낙심하게 되고 근심하게 되고 심지어 자폭할 지경까지 떨어지게 되는 것을 저는 자주 봅니다.

우리 중에도 분명 지금 짓고 있는 죄 때문에, 혹은 과거에 저지른 죄 때문에 극심한 죄책감에 낙심하고 절망해서 난 구원받은 사람이 아닌지도 몰라라는 의심 속에 헤매고 있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특히 제가 놀란 것이 어떤 분들이 제 설교를 오해 하셔서 난 왜 저렇게 거룩한 삶을 살지 못할까하고 더욱 더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다는 소리를 전해 들었습니다. 그건 제 설교를 완전히 오해하신 것입니다. 그게 바로 마귀의 장난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이 부분을 확실하게 설명하고 넘어가야겠다는 생각에 오늘 설교를 준비한 것이니까 혹 그런 분들이 있다면 잘 들어주세요.

출발합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罪人)이었습니다.

 

(로마3:10-18) 10 성서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올바른 사람은 없다. 단 한 사람도 없다. 11 깨닫는 사람도, 하느님을 찾는 사람도 없다. 12 모두가 비뚤어져 쓸모 없게 되었다.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없다. 단 한 사람도 없다. 13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며 그들의 혀는 거짓을 말하고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흐르니 14 그들의 입은 저주와 독설로 가득하다. 15 그들의 발은 피 흘리는 일에 날쌔며 16 간 데마다 파괴와 비참을 남긴다. 17 그들은 평화의 길을 알지 못하고 18 그들의 눈에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다.'

 

이게 바로 우리의 정체였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이러한 악인(惡人)들을 의롭다 하실 수가 없습니다.

 

(잠언17:15) 15 죄를 무죄로 돌리거나 유죄로 다루는 것, 이 둘은 야훼께서 다 미워하신다.

 

그런데 다윗은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의인이라고 당당하게 이야기합니다.

 

(시편7:8) 8 민족들의 재판관이신 야훼여, 이 몸은 아무 허물이 없사오니, 야훼여, 바른 판결을 내려 주소서.

 

그가 어떻게 하느님 앞에서 자신은 의인(義人)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다윗이 하느님 앞에서 죄를 전혀 짓지 않았기 때문에 나온 당당함이 아닙니다.

 

(시편51:1-10) 1 하느님, 선한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어지신 분이여, 내 죄를 없애 주소서. 2 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시고 잘못을 깨끗이 없애 주소서. 3 내 죄 내가 알고 있사오며 내 잘못 항상 눈 앞에 아른거립니다. 4 당신께, 오로지 당신께만 죄를 얻은 몸, 당신 눈에 거슬리는 일을 한 이 몸, 벌을 내리신들 할 말이 있으리이까? 당신께서 내리신 선고 천번 만번 옳사옵니다. 5 이 몸은 죄 중에 태어났고, 모태에 있을 때부터 이미 죄인이었습니다. 6 그러나 당신은 마음 속의 진실을 기뻐하시니 지혜의 심오함을 나에게 가르쳐 주소서. 7 정화수를 나에게 뿌리소서, 이 몸이 깨끗해지리이다. 나를 씻어 주소서, 눈보다 더 희게 되리이다. 8 기쁨과 즐거움의 소리를 들려 주소서. 꺾여진 내 뼈들이 춤을 추리이다. 9 당신의 눈을 나의 죄에서 돌리시고 내 모든 허물을 없애 주소서. 10 하느님, 깨끗한 마음을 새로 지어 주시고 꿋꿋한 뜻을 새로 세워 주소서.

 

지금 다윗이 자신이 죄를 지었다는 것과 자신이 날 때부터 죄인이라는 자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 자신을 깨끗하게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저는 죄인입니다. 그래서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니 저를 깨끗하게 만들어 주세요.” 사이에 어떤 내용이 들어가야 합니까? “제가 잘못했으니까 벌을 달게 받겠습니다.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라는 내용이 들어가야지요? 그런데 다윗은 이 시에서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고백과 그러니 무조건 나를 깨끗하게 해 주세요라는 요구만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은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서 용서받을 방법이 없다는 것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습니다.”라는 약속을 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용서를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1절의 말씀처럼 주님의 인자(仁慈)와 자비(慈悲)에만 호소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구원의 이야기를 아주 상징적으로 잘 나타내 준 곳이 바로 출애굽기 14장입니다.

 

(출애14:13-16,21) 13 모세가 백성들에게 소리쳤다. '두려워 말라. 움직이지 말고 오늘 야훼께서 너희를 어떻게 구원하시는가 보아라. 너희가 오늘 눈앞에 보는 에집트인들을 다시는 보지 않게 되리라. 14 야훼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워 주실 터이니 모두들 진정하여라.' 15 야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어찌하여 나에게 부르짖기만 하느냐?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진하라고 명령하여라. 16 너는 너의 지팡이를 들고 바다 위로 팔을 뻗쳐 물을 가르고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바다 가운데로 마른 땅을 걸어 건너 가게 하여라. 21 모세가 팔을 바다로 뻗치자, 야훼께서는 밤새도록 거센 바람을 일으켜 바닷물을 뒤로 밀어 붙여 바다를 말리셨다. 바다가 갈라지자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홍해 바닷가로 인도하셨습니다. 그곳은 믹돌 사이였습니다. 그러니까 진퇴양난의 저주 속으로 몰아넣으신 것입니다. 게다가 하느님은 모세를 시켜 홍해를 가르시는데 밤새도록 동풍(東風)을 불게 하십니다. 성경에서 동풍은 저주(詛呪)의 바람입니다. 더럽고 추()한 것들을 다 날려버리고 부수어 버리는 바람입니다.

 

(예레18:17) 17 나는 사막(동쪽)의 열풍처럼 불어 닥쳐 내 백성의 원수들 앞에서 흩뜨리리라. 이 백성이 재난을 당하는 날, 나는 등을 돌려 돌봐 주지 않으리라.'

 

(예제17:10) 10 옮겨 심었다고는 하지만 잘 되기는 이미 틀렸다. 동쪽에서 열풍이 불어오면 바싹 마르리라. 자라던 터전에서 그대로 시들리라.''

 

그런데 이스라엘의 구원의 장면에 동풍이 부는 것입니다. 그 동풍은 저주의 바람, 심판의 바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땅의 모든 인간들은 전부 죄인이기 때문에 하느님은 저주의 바람으로 모두 몰살시켜 버리셔야 합니다. 실제로 세상을 상징하는 애굽군대(軍隊)는 그 저주의 바람에 몰살당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 저주의 바람 속에서 살아났습니다. 어떻게 살아나게 된 것입니까?

 

(고전10:1-2) 1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꼭 기억해 두셔야 하겠습니다. 모세 때에 우리 조상들은 구름의 인도를 받았고 모두가 홍해를 무사히 건넜습니다. 2 말하자면 그들은 모두 구름과 바다 속에서 세례를 받아 모세의 사람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그 저주의 바람으로 갈라진 홍해를 건넌 것을 그들이 세례(洗禮)를 받았다고 표현을 합니다. 세례는 우리가 알다시피 죄인(罪人)인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이 태어나는 것을 세례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도 그 홍해 바다에서 다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새 사람으로 탄생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세례를 누구 안에서 받았습니까? 모세에게 속하여 세례를 받았다 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예수 그리스도, 메시야를 상징하는 모세에게 속해서 죽었고 모세에게 속해서 다시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 모두를 모세 안에다 넣고 죽이시고 모세 안에 있는 그들을 새로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그게 구원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죄를 무조건 용서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죄인인 우리를 벌하십니다. 죽여 버리십니다. 그런데 그 저주의 바람이 부는 무시무시한 심판의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품어 안고 대신해서 죽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 것을 새 창조라고 합니다.

창세기의 첫 창조도 똑같은 방식으로 일어났습니다. 암흑과 공허와 혼돈(混沌) 속에 하느님의 영이 수면 위에 운행하십니다. 여기서 하느님의 영이라고 번역된 르와흐바람, 호흡이라는 뜻입니다. 홍해 앞의 상황과 똑같죠?

더럽고 불가능한 죄인들의 모습을 상징하는 암흑과 공허와 혼돈(混沌) 속에 저주의 동풍이 부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 더러운 암흑과 공허와 혼돈(混沌)이 물러가고 빛과 하늘과 바다로 틀이 잡혔던 것처럼 구원은 바로 그러한 맥락에서의 새 창조인 것입니다.

 

거기에는 우리의 공로(功勞)나 노력(努力)이나 헌신(獻身)이나 회개(悔改)가 선행되지 않습니다. 그냥 전적인 은혜(恩惠)인 것입니다. 나도 같이 죽어야 하는 그 저주의 동풍이 부는 홍해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많은 사람들 중에 나를 뽑아내어 품에 안고 대신 죽어 주신 것입니다. 그게 구원입니다.

너 내가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나중에 또 죄 지으면 그 땐 정말 버린다.” 이런 협박이 없습니다. 구원은 거기에 우리가 무엇을 보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의로만 말미암은 것입니다.

 

(요일1:9-10) 9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죄를 하느님께 고백하면 진실하시고 의로우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의 모든 불의를 깨끗이 씻어 주실 것입니다. 10 만일 우리가 죄를 짓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하느님을 거짓말장이로 만드는 것이며 그분의 말씀을 저버리는 것이 됩니다.

 

이렇게 오직 하느님의 의()가 우리를 의롭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것은 과거의 죄, 현재의 죄, 미래의 죄가 모두 공짜로 하느님의 의()에 의해 해결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여전히 죄를 짓고 있는데도 너희는 이미 죄에 대해 죽었다라고 과거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어차피 우리들이 앞으로 어떻게 사는지는 구원에는 영향을 미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이미 새 옷을 입었다, 새 사람을 입었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로마6:6-7) 6 예전의 우리는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서 죄에 물든 육체는 죽어 버리고 이제는 죄의 종살이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7 이미 죽은 사람은 죄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옛 사람이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었다고 말합니다.

 

(골로3:9-10) 9 그리고 거짓말로 서로 속이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옛 생활을 청산하여 낡은 인간을 벗어 버렸고 10 새 인간으로 갈아 입었기 때문입니다. 새 인간은 자기 창조주의 형상을 따라 끊임없이 새로와지면서 참된 지식을 가지게 됩니다.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은 것이 과거 시제입니다. 우리는 이미 새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에페2:5-9) 5 잘못을 저지르고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려 주셨습니다. 6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살리셔서 하늘에서도 한 자리에 앉게 하여 주셨습니다. 7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은총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앞으로 올 모든 세대에 보여 주시려고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이렇게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8 여러분이 구원을 받은 것은 하느님의 은총을 입고 그리스도를 믿어서 된 것이지 여러분 자신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9 이렇게 구원은 사람의 공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도 자기 자랑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이 에페소서의 말씀처럼 구원은 하느님의 선물(膳物)입니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혜(恩惠)로 거저 주어진 것이 구원(救援)입니다.

그 구원에는 구원의 현재 시제인 성화와 구원의 미래 시제인 영화까지도 다 포함 된 것이지요? 그 모든 것이 다 하느님의 선물로 우리에게 거저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성화까지도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원받은 우리 성도들은 설사 그들이 지금 여전히 죄를 짓고 있다 하더라도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죄를 씻어내 고 잘라내는 것 역시 하느님의 은혜로, 선물로 완성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제가 그토록 외치는 거룩한 삶도 하느님의 선물로 우리에게 거저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잘 들어보세요.

 

(요한17:19) 19 내가 이 사람들을 위하여 이 몸을 아버지께 바치는 것은 이 사람들도 참으로 아버지께 자기 몸을 바치게 하려는 것입니다.'

 

(고전1:30) 30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리스도 예수와 한 몸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께서 주신 우리의 지혜이십니다. 그 분 덕택으로 우리는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이게 되었고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었고, 해방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다 하느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거룩은 우리가 열심히 연마해서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자신이 거룩이시고 그 분이 이미 나의 거룩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경(聖經)우리의 거룩함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셔서 우리에게 주셨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하느님의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필리2:12) 12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내가 함께 있을 때에도 언제나 순종하였거니와 그 때뿐만 아니라 떨어져 있는 지금에 와서는 더욱 순종하여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여러분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힘쓰십시오.

 

이 말은 우리가 우리의 삶을 보면서 혹시 난 구원받은 사람이 아닐지도 몰라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거룩하게 살려고 힘쓰라는 말이 아닙니다. 만일 그게 그런 뜻이라면 사도 바울과 사도 요한은 둘이 완전히 상반된 교리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요일4:18) 18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 냅니다. 두려움은 징벌을 생각할 때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을 품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보세요. 여기서는 두려워하는 자는 구원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사도 바울 자신이 한 말과도 모순이 됩니다.

 

(디모후1:7) 7 하느님께서 주신 성령은 우리에게 비겁한 마음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를 주십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은 무슨 말일까요?

사도 바울이 그 똑같은 단어를 고린도서에서 쓴 적이 있습니다.

 

(고전2:3) 3 사실 나는 여러분에게 갔을 때 약하였고 두려워서 몹시 떨었습니다.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복음은 나의 재주나 나의 능력으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약함을 고백하는 구절입니다.

그러니까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의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은 우리 성도들이 구원은 그 어떤 부분도 우리의 힘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바로 그 마음,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열심히 나의 거룩을 이루어 내야지가 아니라 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이구나두렵고 떨림인 것입니다.

 

(1베드1:2) 2 여러분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미리 세우신 계획에 따라 뽑혀서 성령으로 거룩하게 되어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하게 되었으며 그분의 피로 죄가 씻겨진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에게 은총과 평화가 충만하기를 빕니다.

 

보세요. 순종은 우리가 만들어 내는 것입니까? 하느님이 주시는 것입니까? 성경은 순종까지도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명확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구원의 과거시제, 현재시제, 미래시제 그 모든 것은 다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시켜서 아무 능력 없고 아무 가능성 없는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것입니다.

왜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맏아들, 장자라고 부르는지 아세요?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장자는 아버지와 동격입니다. 동격일 뿐 아니라 아버지의 모든 유산을 물려받는 상속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 전부터 하느님의 맏아들이셨습니다. 그 분은 하느님 아버지의 모든 것을 소유하신 분이시고 그 모든 것을 다스리는 권세가 있으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모든 창조물과 그 분의 계획 모두를 상속받으신 하느님의 장자이십니다. 상속을 받는다는 것은 단순히 아버지의 것을 모두 물려받는 다는 의미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자신의 뜻으로 삼는다는 합일의 의미도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느님의 뜻과 계획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즉 십자가가 들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장자로서 그 수난과 죽으심까지도 다 순종(順從)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그게 진정한 장자입니다. 그게 진정한 상속인 것입니다. 그래서 장자의 명분을 지키지 못하고 팔아 버린 에사오를 끝까지 장자의 명분을 지키신 예수님과 비교해서 악의 상징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분이 또 한 번 장자로 나십니다. 이제 인간이 되셔서 또 한 번 하느님의 맏아들이 되십니다.

 

(골로1:18) 18 그리스도는 또한 당신의 몸인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그분은 모든 것의 시작이시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최초의 분이시며 만물의 으뜸이 되셨습니다.

 

여기서 먼저 나신 자라고 번역이 된 프로토토코스첫 아이, 처음 태어난 아이맏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구절은 인간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제일 먼저 살아 나셔서 맏아들로 태어나셨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5:5) 5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대사제와 영광스러운 자리를 스스로 차지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 영광스러운 자리는,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 하고 말씀하신 하느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이 구절을 가지고 혹자들이 예수님은 하느님에 의해 창조된 분이라고 우기지요.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어떤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다시 한 번 하느님의 맏아들로 태어나셨음을 가리키는 것이지 예수님의 피조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첫 번째 창조 때 예수 그리스도께 그 모든 만물을 주시고 다스리게 하셨듯이 하느님은 두 번째 창조, 즉 우리 하느님의 자녀들을 택하시고 그 예수 그리스도에게 우리 새 창조물들을 상속하시기 위해 그 분을 다시 맏아들로 탄생시키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약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호칭, “맏아들은 새 창조의 후사로서의 호칭인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 새 창조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새 창조의 시행자로, 상속자로 세우셨습니다. 그것을 오늘 날, 내가 너를 낳았다라고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은 우리 하느님의 백성들을 택하셔서 상속자인 맏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셨고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그들을 아버지께 받아서 새롭게 창조해 내신 것입니다.

 

(요한6:39) 39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내게 맡기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모두 살리는 일이다.

 

(요한17:6) 6 '나는 아버지께서 세상 사람들 가운데서 뽑아 내게 맡겨 주신 이 사람들에게 아버지를 분명히 알려 주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본래 아버지의 사람들이었지만 내게 맡겨 주셨습니다. 이 사람들은 과연 아버지의 말씀을 잘 지키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하느님께로부터 우리를 상속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새롭게 창조 하셨습니다. 그것은 첫 창조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히브1:2) 2 그러나 이 마지막 시대에 와서는 당신의 아들을 시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통해서 온 세상을 창조하셨으며 그 아들에게 만물을 물려주시기로 하셨습니다.

 

하느님이 먼저 자신의 맏아들을 만물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그로 말미암아 세상을 창조하게 만드신 것처럼 새 창조 때도 인간의 육신을 입으신 맏아들을 세우시고(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하시고) 하느님의 사람들을 상속하시고 그 맏아들을 통하여 그들을 새 창조물들로 창조케 하셨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새롭게 창조된 우리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똑같은 공동상속자(共同相續者)라고 부릅니다.

 

(로마8:17) 17 자녀가 되면 또한 상속자도 되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을 받을 사람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고 있으니 영광도 그와 함께 받을 것이 아닙니까?

 

그렇게 새롭게 창조된 우리는 예수님과 공동상속자(共同相續者)입니다. 그 말은 하느님은 우리 모두를 장자로 취급해 주신다는 말입니다.

 

(히브12:22-23) 22 그러나 여러분이 와 있는 곳은 시온산이고 살아 계신 하느님의 도성이며 하늘의 예루살렘입니다. 거기에는 수많은 천사들이 있고, 잔치가 벌어져 있고 23 또 하늘에 등록된 장자들의 교회가 있고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느님이 계시고 완전히 올바른 사람들의 영혼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장자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가 지니고 계신 거룩과 영광을 상속받아 지니게 된 자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은혜로 구원을 받고, 예수님과 공동상속자가 된 사람들이 죄를 짓습니까?

우리의 옛 사람은 이미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하는데 왜 우리는 여전히 그 옛 사람이 저질렀던 짓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여전히 죄와 상관이 있는 사람들인가요? 이걸 잘 구별해야 그 쓸데없는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구원받은 사람들이 짓는 죄는, 죄가 아니라 육신의 습관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습니다. 이제 우리는 죄와는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에게서 나가는 행위나 생각들은 죄의 모양을 띠고 있지만 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습관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거룩한 자가 되었지만 그 육신의 습관이 우리 안에 새롭게 창조된 새 사람의 광채를 막아버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육신의 습관을 자꾸 제어하고 하느님께서 주신 거룩한 새 사람의 삶을 나타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육신의 습관을 떨어내는 것은 그리 쉽지가 않습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이후에도 자꾸 그 육신의 습관에 젖어서 그 매력에 푹 빠지곤 합니다. 성경은 거기서 빠져 나와 우리가 받은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 수 있는 비결을 제시합니다.

 

(필리1:27-28) 27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은 사람다운 생활을 하십시오. 그리고 내가 여러분을 찾아 가서 만나게 되든지 이렇게 떨어져 있든지간에 나는 여러분이 복음의 교리를 위하여 한 마음 한 뜻으로 굳게 서서 분투노력하며 28 반대자들이 무슨 짓을 하더라도 조금도 겁내지 않는다는 소식을 듣고 싶습니다. 그러한 용기가 그들에게는 멸망의 징조가 되고 여러분에게는 구원의 징조가 될 것입니다. 구원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육신의 습관(習慣)에 자꾸 빠지지 않고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할 수 있는 방법으로 한 성령으로 굳세서는 것을 제시합니다. “한 성령으로 굳게 서는 것은 사도 바울이 우리가 좀 전에 함께 읽었던 출애굽기 14장에서 인용 해다가 쓴 구절입니다.

 

(출애14:13) 13 모세가 백성들에게 소리쳤다. '두려워 말라. 움직이지 말고 오늘 야훼께서 너희를 어떻게 구원하시는가 보아라. 너희가 오늘 눈앞에 보는 에집트인들을 다시는 보지 않게 되리라.

 

사도 바울은 우리가 복음에 합당하게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가 열심히 노력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죄책감에 자신을 자폭시키는 것도 아닌 출애굽 사건이 상징하는 구원을 이해하는 길밖에 없음을 피력하는 것입니다.

모든 죄인이 죽어야 하는 성령의 바람, 저주의 바람인 동풍이 부는 곳에서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속하게 하셔서, 즉 그리스도 안에 우리를 넣으셔서 건져내신 그 은혜의 사건을 이해하고 올바로 인식하는 것만이 우리가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살아날 수 없는, 구원에 있어서는 도저히 어떤 근거나 조건도 갖다 댈 수 없는 그런 자들이었지만 하느님께서 은혜로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새롭게 창조해 주셨다는 그 복음이 이해되는 자들은 자신의 신분을 자각하고 거기에 합당한 삶을 경주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필립보서 128절에 반대자들이 무슨 짓을 하더라도 조금도 겁내지 않는다는이라는 구절이 붙어있는 것입니다.

대적들이 우리를 미혹하고 꾀어 다시금 육신의 습관에 젖게 하고 때로는 극심한 고통 속에 던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저주의 동풍 속에서 굳게 서서 지켜 본 그 구원의 드라마에 의하면 우리는 그럴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하느 님은 나를 죽이셨고, 그런데 그 저주의 칼을 예수가 대신 맞아 주셨고 나는 새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기 때문에 나는 때때로 나를 넘어뜨리는 이 육신의 습관을 지켜보면서도 결코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죄책감에 빠질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런 모습이 내 속에서 나타날 때, “이래서 하느님은 나를 죽이실 수밖에 없었구나, 그런데 그 죽음의 동풍을 우리 예수가 맞아 주셨구나. 이게 웬 은혜인가? 그래 난 그렇게 하느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의 목숨을 지불하고 건져내신 엄청난 자구나,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지하고 우리는 우리 안에 거룩으로 이미 와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조금씩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정리를 해 보겠습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이제 죄와는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거룩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그 속에 거룩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육신의 습관이라는 것이 자꾸 성도들의 삶 속에서 삐죽 삐죽 올라옵니다. 사탄은 그 육신의 습관이 올라 올 때 봐 네가 진짜 구원받았다면 이렇게 여전히 죄를 지을 수 있단 말이야? 넌 구원받은 사람 아니야라고 속삭여서 성도를 죄책감에 빠지게 만듭니다.

사탄은 그렇게 해서 성도의 성숙을 막고 성도가 누려야 할 기쁨을 빼앗아 가 버립니다.

그 때 우리 성도들은 이건 죄가 아니라 육신의 습관일 뿐이야, 이미 나의 모든 죄는 예수 안에서 다 해결되었다. 어떻게 여전히 이런 더러운 육신의 습관 속에 젖어 있는 내가 하느님의 은혜를 입게 되었는가?”하고 오히려 홍해 바닷가에 굳게 서서 저주의 동풍 속에서 일어났던 구원의 드라마를 바라보았던 이스라엘처럼 하느님의 은혜에 감격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그러한 실패와 좌절 속에서, 이런 추악한 죄인을 그렇게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구원해 주신 하느님의 사랑을 점점 더 깊이 깨닫게 되는 것이고 그 은혜와 사랑의 깊이를 깨달은 만큼 육신의 습관을 제어하고 하느님께서 허락해 주신 거룩한 삶의 광채를 밖으로 조금씩 더 밝게 비추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오스딩은 구원받은 우리 성도들의 상태를 “ABLE NOT TO SIN, 죄를 안 지을 수 있는 상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제가 거룩하게 살도록 노력하라고 외치는 것은 우리의 노력으로 거룩을 완성해 내라. 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자들이 맞다면 우리는 육신의 습관에 의해 자주 실패하고 실수를 하게 될 것이고 그러한 실패와 실수가 우리를 다시 동풍이 부는 홍해 바닷가로 인도할 것이고 거기서 하느님의 은혜의 구원을 더 깊이 깨닫게 될 것이고, 그 감사가 우리의 육신의 습관들을 하나하나 제거해 나갈 것이기 때문에 노력하라, 성실하라, 진지 해 져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노력을 해야 자신이 얼마나 불가능한 존재인지 깨달을 것 아닙니까? 그래서 노력한 만큼 우리는 자라 게 되는 것입니다. 이 역설을 잘 이해해 주십시오.

노력한 만큼 우리의 거룩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노력한 만큼 우리에게 실망하게 될 것이고 그 때마다 홍해 바닷가에 서게 될 것이고 구원의 은혜가 어떤 것인지 깨닫게 될 것이며, 그 때 우리의 거룩을 조금 씩 조금씩 더 밝게 꺼내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지은 죄가 생각날 때, 혹은 지금 죄를 지으면서 죄책감으로 가서는 안 되고 오히려 은혜의 바다 홍해로 가십시오. 그리고 거기서 기뻐하세요. 그래서 성경은 항상 기뻐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는 그렇습니다. 죄를 짓고도 기뻐할 수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게 우리의 특권입니다.

 

saving private ryan(라이언 일병 구하기)이라는 영화가 있었죠. 톰 행크스가 주연한 아주 훌륭한 영화입니다.

네 형제를 2차 대전에 내 보낸 미국의 한 시골 마을의 아주머니의 세 아들이 동시에 전사를 합니다. 그런데 막내아들도 공수부대의 일원으로 독일 시내 한 복판에 던져져 있습니다. 미군 사령부에서 그 막내아들을 살려서 고향으로 돌려보내라는 명령을 톰 행크스의 부대에 하달합니다. 중대장인 톰 행크스와 그의 부대원들은 그 라이언 일병을 구출하기 위해 독일 시내로 진입합니다. 진입하는 과정에서 많은 부대원들이 죽습니다.

결국 모든 부대원과 톰 행크스까지 다 전사하고 그 라이언 일병은 살아남습니다. 그 때 톰 행크스가 다리 위에서 그 라이언 일병에게 유언을 합니다. “라이언 넌 꼭 살아서 훌륭한 삶을 살아다오그리고 죽습니다.

나중에 그 라이언 일병이 할아버지가 되어서 톰 행크스의 무덤에 와서 오열을 하며 말합니다. “난 중대장님의 유언대로 한 평생 훌륭한 사람으로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옆에 있는 아내에게 묻습니다. “내가 정말 훌륭한 삶을 살았소?” 아내가 말합니다. “네 당신은 참 훌륭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 라이언 일병은 자기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자신들의 목숨을 초개같이 버린 중대장과 동료 전우들의 사랑을 실감했기 때문에 자기의 목숨을 구해 준 사람의 유언대로 한 평생 열심히 산 것입니다.

 

우리가 때로 우리의 실패와 실수로 낙담할 수 있습니다. 그 때 이런 보잘것없는 나를 위해 목숨을 끊어가며 구속(救贖)의 전쟁을 펼쳐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떠올리십시오. 그리고 진정 그게 감사하거든 그 분이 우리에게 어떤 유언을 하셨는지 기억하십시오.

정말 우리가 홍해 바다에서의 그 구원의 이야기를 실감하고 믿고 있다면 그 라이언 일병이 살아 낸 훌륭한 삶을 우리도 살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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