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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의 신앙과 고백의 두 글을 읽고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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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지리산 천왕봉을 1박 2일로 다녀왔다. 백무동 근처의 은정 마을에서 출발해 벽소령을 거쳐 세석으로 갔다. 여기서 갈림길이다. 장터목을 해서 천왕봉을 올라 중산리로 하산하는 코스가 있고, 다시 백무동으로 하산 하여 1박하고 천왕봉을 타는 코스가 있다. 벽소령에서 세석까지가 지리산 종주의 별미 코스다. 은정에서 여기까지가 5시간의 산행이었다. 여기서 천왕봉을 타는 것은 야간 산행을 해야만 했다. 이건 무리라는 생각에 백무동에서의 1박을 결정해서 한신 계곡을 타기로 한 것이다. 한신의 그 계곡은 참으로 웅장하고 위험했다. 정말 난코스였다. 하산 길도 이리 어려운데 틈틈이 오르는 이를 보면서 불쌍한 맘도 들었다. 더욱이 자매님을 보노라면 안쓰럽기까지 했다. 다시는 백무동에서의 세석 길 등정을 불가능함을 마음먹었다. 그만큼 힘들었다. 그러면서도 하느님이 계시긴 할까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만큼 웅장함이 장장 2시간의 하산 길의 연속이었다. 아무리 전지전능 하느님이시지만, 이런 창조는 불가능할 것이라는 마음이 온통 나를 억눌렀다. 하느님이 정말 계시긴 할까? 1500근처에서 700고지 근처로 내려오니 온통 단풍이다. 계곡의 물과 파아란 하늘을 빼고는 전체가 붉다. 붉은 게 아니라 마치 불 속을 걷는 것 같았다. 천국이 이보다 좋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앞을 보아도 뒤를 보아도 붉은 기운이 마치 성령처럼 다가오는 것 같았다. 마치 꾸르실료 교육을 받는 기분이랄까? 이는 하느님의 섭리라 여겨졌다. 하느님만이 창출할 수 있는 분위기라 여겨졌다. 하느님의 위대함을 느꼈다. ‘하느님이 계시긴 할까?’에서, 위대하신 하느님의 능력에 감탄사의 연발이었다. 그 지옥 길에서 천국 길을 한 시간 남짓 걸으면서 어디에서나 성령으로 계시는 하느님에게 감사함을 담뿍 느끼면서 11월의 가을 단풍을 원도 없이 힐링하며 하산했다. 이튿날 다시 백무동에서 장터목까지 산행 길에 올랐다. 안내소 자매님께 물었다. '참샘'을 거쳐 장터목 코스의 난이도를 물었다. 자매님은 어제의 8시간 탐방에 이어 오늘의 장터목을 거쳐 천왕봉 코스는 무리라고 조언을 주었다. 그렇지만 어차피 작정한 천왕봉 산행인지라 출발했다. 백무동에서의 장터목 코스는 나름으로 훨씬 쉬웠다. 군데군데 평 길도 있었고, 가끔은 안개 바람이 온 몸을 식혀주었다. 장터목에서 천왕봉 오름은 안개와 바람의 연속이었다. 안개가 바람따라 지나가면 파아란 하늘이 다가오고, 완연한 가을 단풍이 산 아래에 널려있다. 자연은 참으로 위대한 하느님의 창조물로 여겨졌다. 지리산은 참으로 웅장했고, 여러 기관에서 선정한 100대 명산을 다 오르는 것보다, 이 지리산 하나에 남은 온 여생을 다 보내야 함을 느꼈다. 천왕봉에서의 한 모금 물은 온 몸을 짜릿하게 녹여준다. 이제 내려 갈 길만 남았다 법계사 쪽에서 오르는 젊은 분들마저 호흡이 가파르다. 산 아래가 온통 가을빛이다. 로터리 산장에서 주먹밥을 먹었다. 이온 음료수에다 밀감도 깠다. 이 먹는 재미로 산행하는 게 아닐까? 1박 2일의 15시간 지리산 탐방은 올 한 해의 등산을 마무리하는 것 같다. 이상의 산행 소감에서 같은 한신 계곡의 하산 길에서 하느님에 대한 불신과 하느님에 대한 무한한 감사를 번갈아 느꼈다. 이렇게 믿음은 때와 장소에 따라 좀은 다른가 보다. ‘아인슈타인의 고백과 신앙’의 두 글에서도 이런 상반된 것을 느끼는 것 같다. 그래서 종교와 과학, 그리고 종교에서 기독교와 불교에 대해 제 나름으로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먼저 1933년 아인슈타인이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강의(講義) 한 내용(內容)을 제 나름으로 다시 풀이해 보았습니다. 위대한 과학자의 위대한 강의였다고 여겨집니다. ~~~~~~~~~~~~~~~~~~~~~~~~~~~~~~~~~~~~~~~~~~~~~~~~~~~~~~~~~~~~~~~~~~~~~~~~~~~~~ “과학(科學)은 진리(眞理)와 이해(理解)를 향한 열정(熱情)을 가진 사람에게서 창조(創造) 된다. 그러나 이러한 감정(感情)의 원천(源泉)은 ‘종교(宗敎)’에서 나오고, 여기에 신앙(信仰)이 속해 있다.“ 그는 심오한 신앙이 없는 순수한 과학자(科學者)를 생각할 수 없다. 과학자(科學者)의 모든 열정(熱情)과 헌신(獻身)은 신앙(信仰)에서 나오며, 과학은 결코 종교(宗敎)와 대적(對敵)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분리(分離) 될 수도 없다. “하느님은 주사위를 던지시지 않는다. 그리고 하느님은 결코 겉옷에 심장(心臟)을 달고 계시지 않는다.” 만물(萬物)의 운행(運行)은 주사위를 던지는 식의 우연(偶然)으로 일어나지 않고, 모든 일에는 하느님의 운행하심과 이유(理由)가 있다. 심장(心臟)이 몸속에 있기에 보이지 않는 것처럼, 하느님의 뜻은 단지(但只) 겉으로 보이는 것만으로는 알 수 없고 만물의 뒤를 봐야 알 수 있다. 과학(科學)을 비롯한 모든 창조물(創造物)을 통해서 우리는 우주(宇宙) 만물(萬物)을 다스리시는 놀라운 하느님의 섭리(攝理)를 발견(發見) 할 수 있다. ~~~~~~~~~~~~~~~~~~~~~~~~~~~~~~~~~~~~~~~~~~~~~~~~~~~~~~~~~~~~~~~~~~~ 이 내용을 참조로 해서, 제가 생각하는 종교인 신앙과 과학과의 관련된 내용입니다. 과학은 종교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무한의 종교를 과학이 어디 접근할 수가. 그래서 과학은 끝도 없는 종교의 영역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만드신 그 거시 세계와 미시 세계를 과학은 지금까지 무수히 인내하면서 잘도 이끌어 왔습니다. 이것이 과학이 지금껏 온 길이고 앞으로도 가야 할 길이라고 보여집니다. 무한의 종교 개념이 없었다면, 과학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무한의 종교가 등장했기에 유한의 과학이 지금껏 발전했고 앞으로도 나아갈 겁니다. 그러면 사실 종교란 무엇일까요? 믿음 아닙니까? 변하지 않을 믿음, 진리 그 자체가 종교입니다. 기독교를 나는 대표적인 종교라고 정의합니다. 오직 한분이신 하느님이 계시고 전지전능하신 그분께서 온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진정 믿게 하시려고 이천년 전에 예수님이란 이름으로 우리에게 오시어 연민의 정으로 온 인류에게 겸손과 배려를 보이셨습니다. 오직 ‘작은 이’들에게 다가가시어 함께 고통을 나누시면서 치유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죄를 사하시고자 십자가 죽음과 사흘만에 부활하시여 승천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이 삼위일체의 하느님을, 우리는 창조주로 믿는 신앙인입니다. 우리는 이런 종교를 믿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불교는 이와는 좀 다릅니다. 석가모니는 깨달은 자 입니다. 그리고 그는 중생을 깨달아 보라고 설파하십니다. 불교 역시 많은 교리가 있습니다. 성경의 '잠언'이나 '집회서'에 버금가는 철학적 요소가 담긴 내용들입니다. 공자나 맹자, 한비자, 노자, 장자 등의 이천오백 년 전의 그 심오한 사상이 오늘도 우리에게 불교 교리와 엇비슷한 깊은 철학으로 다가옵니다. 그 때의 사람들 삶이 지금보다 하나도 변한 게 없는 것 같습디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기독교나 불교 다 깨우침일 것입니다. 자비와 사랑으로 겸손과 배려입니다. 그렇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위대한 과학자이자 신앙인이었다고 여겨집니다. 믿음이 없이는 탐구는 불가능하니까요. 그의 세대에 빛은 파동설에서 입자설로 진일보했습니다. 그래서 빛에서 에너지를 얻었을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빛의 이중성이 정설입니다. 상대성 이론도 시간 개념을 도입한 겁니다. 빛과 같은 속도로 움직이는 물체의 길이가, 정지된 상태에서 얻은 것과 같을 수 있을까요? 반면에 빛과 같은 속도로 움직이는 곳에서 정지된 물체의 길이를 정확히 측정할 수가 어디 있을까요? 이렇게 다 상대적입니다. 참으로 위대한 과학자의 상대성 이론입니다. 그렇지만 상대적이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진리입니다. 변하는 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진리는 오리지널 하느님 말씀뿐입니다. 그 변하지 않는 하느님 말씀을 믿는 것을 종교라 하고, 그것을 믿는 이를 우리는 신앙인이라 부릅니다. 그렇습니다. 과학은 종교를 통해서 진보했고, 종교 때문에 앞으로도 계속 힘차게 나아갈 것입니다. 하느님 말씀인 진리를 믿는 것이 종교이고, 이 신앙을 삶의 지표로 삼는 자가 바로 신앙인입니다.
감사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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