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7월 2일 (목)
(녹)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군중은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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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우 신부님_조욱현 신부님_김건태 신부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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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석 [wsjesus] 쪽지 캡슐

14:05 ㅣ No.190407

이병우 신부님_"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마태9,6ㄷ) 

 

'함께 마음의 중풍을 치유하자!' 

 

오늘 복음(마태9,1-8)은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를 고치시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중풍 병자를 평상에 뉘어 예수님께 데려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십니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태9,2ㄷ)

그리고 못마땅해 하는 율법 학자들이 보는 앞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에게 알게 해 주겠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마태9,6)

군중은 두려워하며,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두 가지'를 함께 나누어 보고 싶습니다.

하나는 '너의 구원을 위한 나의 노력'입니다.

또 하나는 육신의 중풍이 아닌 '마음의 중풍'입니다.

마음이 제대로 움직이지를 못하는, 곧 예수님의 마음이 아니라, 내 마음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그런 중풍병입니다. 

 

저는 종종 생각합니다. 소박한 저의 복음묵상글을 통해 매일 만나는 형제자매님들이 바로 나의 천사님들이고, 여러분의 기도로 살아가고 있다는 고백을 종종합니다. 감사드립니다. 저도 여러분을 기억합니다. 매일 미사를 드릴 때마다, 기도할 때마다 기억합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저의 천사시네요. 우리는 그렇게 서로에게 천사입니다. 

 

서로가 이런 천사들의 도움을 받아 다시 살아납니다.

마음이 움직이지 못하는 마음의 중풍에서 해방됩니다.

그래서 제대로 보면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행하신 치유이며, 날마다 우리 안에서, 내 안에서 일어나기를 바라는 치유(기적)입니다. 

 

오늘도 나의 마음이 예수님께로 향해 있고, 또 너도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기적을 만들어 내는 복된 하루가 되기를 소망하면서 오늘 하루를 시작합시다! 

 

(~ 시편50,23) 

 

조욱현 신부님_중풍 병자를 고치시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단순히 육신의 병을 고쳐 주시는 분이 아니라, 죄를 용서하시는 권한을 가지신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신다. 오늘 복음은 특별히, 병자가 스스로 예수님께 나아간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손에 의해 주님 앞에 왔다고 증언한다.(2절) 이는 우리 신앙의 여정을 잘 드러낸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기도와 인도, 신앙 공동체의 도움으로 주님께 나아오게 되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 대목을 묵상하며 이렇게 말한다. “그분은 병자의 믿음만 보신 것이 아니라, 그를 데려온 이들의 믿음도 보셨다. 이는 우리에게 형제의 신앙이 우리의 구원에도 큰 몫을 한다는 것을 보여 주신다.”(In Matthaeum Homilia XXIX 요약) 우리도 다른 이들을 주님께 데려오는 믿음의 도구, 천사 같은 이웃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육신의 병이 아니라, 죄의 용서를 선포하신다. “애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2절) 이는 병의 원인이 곧 죄라는 단순한 등식이 아님을 보여 주신다. 오히려 주님은 인간 고통의 근원적 문제인 죄를 다루신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가르친다. “병자는 침상에 누워 있었으나, 더 무겁게 눌러 짓누르고 있던 것은 죄였다. 주님은 먼저 병의 뿌리를 뽑으셨다. 곧 죄를 용서하시어 치유하신 것이다.”(Sermo 50,2 요약) 예수님의 치유는 단순한 기적 행위가 아니라, 구원 사건이다. 죄의 용서와 육신의 회복은 분리될 수 없는 구원의 표징이다.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이 하느님을 모독한다고 비난한다. 왜냐하면, 죄를 용서하는 것은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권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병자를 일으켜 세우시며, 자신이 땅에서 죄를 용서할 권한을 가진 ‘사람의 아들’임을 드러내신다.(6절) 이는 단순히 치유자 예수를 넘어, 하느님의 권능을 지니신 분임을 선포하는 것이다. 교리서는 말한다. “예수님께서는 사죄의 권한을 사람의 아들로서 행사하시면서, 그것을 교회에 맡기셨다. 그분은 교회의 사도들에게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주셨다.”(1441항) 

 

병자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일어나 집으로 갔다.”(7절) 단순히 집으로 돌아간 사건이 아니라, 이는 잃었던 낙원, 하느님과의 친교로 돌아감을 상징한다. 성 에프렘은 주석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는 육신의 병상에서 일어나 집으로 돌아갔으나, 더 깊이 보면, 그는 죄의 병상에서 일어나 생명의 집, 곧 하느님께 돌아갔다.”(Commentarius in Diatessaron XV,20 요약) 우리의 구원도 이와 같다. 죄로 인해 잃었던 본 고향, 하느님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분은 단순한 치유자가 아니라,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하느님께로 돌려보내시는 구원자이시다. 날마다 죄의 용서와 치유를 통해, 날마다 “집으로 돌아가는 여정”을 살아가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김건태 신부님_하느님 나라와 용서

 

오늘 예수님은 “당신이 사시는 고을”에서 중풍 병자를 치유하시는 기적을 행하십니다. 마르코는 이 고을을 카파르나움으로 명시하고 있는데(2,1), 이는 예수님이 카파르나움에 세금을 내고 계셨기 때문에(17,24-27 참조), 이렇게 불렸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본문 다음에 마태오 부름에 관한 장면이 등장하는데, 그곳에 ‘세관’이 있었다는 사실도 이를 뒷받침해 줍니다.

 

먼저,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평상에 뉘어 그분께 데려옵니다.” 걸을 수 없는 상태의 이 병자는 이웃들에게 도움을 청했을 것이고, 병자의 고통에 가엾은 마음으로 늘 함께했던 이웃들은 흔쾌히 그를 평상에 뉘어 예수님 계신 곳으로 데려왔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중풍 병자의 치유에 대한 간절한 마음 이상으로, 바로 그 선한 마을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즉각적으로 치유의 말씀을 던지십니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죄의 용서는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증거이며 보증입니다.

 

그런데 이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는 사실을 애써 부인하려는 사람들, 영적인 치유가 필요한 사람들이 그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죄를 용서’를 ‘신성 모독’으로 단정하고 있는 율법 학자들입니다. 구약시대는 물론 신약시대에도 현세적 상선벌악 사상, 곧 현세에서 이미 선(善)에는 상(償), 악(惡)에는 벌(罰)이 뒤따른다는 사상에 젖어 있던 유다인들, 그 가운데서도 율법 학자들은 현세의 병을 포함한 모든 불행을 죄의 결과로 받아들였습니다. 죄를 용서한다는 것은 따라서 병의 치유를 전제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쉬우냐?’” 하고 물으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제 사람이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주겠다.” 하고 말씀하신 다음, 중풍 병자에게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하고 이르시는 것을 보면, 결과는 동일하다 하더라도, 영적인 치유 곧 ‘죄의 용서’가 육체적인 치유 곧 ‘병의 치유’를 훨씬 넘어선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시는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육체적인 치유가 주어진다고 하더라고 하느님과의 관계를 바로잡는 영적인 치유가 결여되어 있다면, 그것은 진정한 치유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중풍 병자의 ‘죄의 용서를 통한 치유’ 앞에서, 정확하게 말해서 예수님은 물론 예수님의 뒤를 이어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율법 학자들만 측은하게 보일 뿐입니다. 치유가 필요한 사람들은 바로 이들이었으나, 예수님의 복음 전파 활동 내내 반대와 적대로 일관하고 있는 것을 보면, 하느님 나라와는 정말 거리가 먼 사람들입니다.

오늘 복음 속의 중풍 병자처럼 이웃의 도움이 필요할 때 망설임 없이 도움을 청하는 용기, 이웃이 도움을 청할 때 주저함 없이 나서는 신앙인의 삶을 다짐하며, ‘죄의 용서’를 통해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깨닫고 이 나라를 널리 알리는, 활기찬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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