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은 명령하지 않으십니다. "고쳐라"가 아니라 "내가 주겠다"입니다. 돌 같은 마음을 살 같은 마음으로 바꾸는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이십니다.
복음과 독서 말씀이 나에게 건네는 메시지는 이러했습니다.
첫째, 불의는 마음을 돌처럼 만든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우리는 흔히 "불의한 시대"를 바깥의 문제로만 생각합니다. 저 사람들의 탐욕, 저 구조의 부패, 저 시스템의 잘못. 그런데 에제키엘의 메시지는 먼저 우리 자신을 향합니다. 불의한 시대를 오래 견디다 보면, 분노하고 냉소하고 무감각해지면서 우리 마음도 함께 굳어갑니다. 정의를 외치던 사람이 어느새 자신도 돌 같은 마음으로 세상을 대하게 되는 일은 드물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그 사실을 먼저 직시하게 합니다.
둘째, 그럼에도 절망이 마지막 말이 아니라는 것.
가장 절망적인 시대에 주어진 약속이었다는 사실이 오늘도 유효합니다. 지금 이 시대가 아무리 불의해 보여도, 그것이 하느님의 개입을 막는 조건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시대일수록 이 말씀은 더 절실하게 다가옵니다. "이 시대는 가망이 없다"는 체념이야말로 돌 같은 마음의 다른 얼굴일지 모릅니다.
셋째, 변화는 언제나 안에서 시작된다는 것.
지금 우리는 구조를 바꾸고 제도를 개혁하는 일에 익숙합니다. 그것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과 베르나르도의 삶이 함께 가르치는 것은, 바깥을 바꾸려는 이의 마음이 먼저 바뀌지 않으면 그 개혁조차 또 다른 형태의 완고함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적 인간이 먼저 채워지지 않으면 밖으로 흘러나갈 것이 없다"는 그의 말은, 사회 참여를 부정하는 말이 아니라 그 참여의 뿌리가 어디서 와야 하는지를 가리킵니다.
넷째, 그것은 청하는 기도로만 시작된다는 것.
결국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남기는 가장 실천적인 메시지는, 불의한 시대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첫 번째 일이 분석이나 비판이 아니라 "넣어 주십시오"라는 청원이라는 것입니다. 이 청원은 무력한 태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스스로 마음을 고칠 수 없다는 정직한 인정에서 나오는, 가장 근본적인 저항의 시작입니다.
오늘 복음의 혼인 잔치에서 초대는 모두에게 열려 있었지만, 예복을 입지 않은 이는 쫓겨났습니다. 초대에 응한 것만으로는 부족했습니다. 이 예복이 곧 새 마음입니다. 은총은 값없이 주어지지만, 그것을 받아들이고 입는 일은 우리의 몫으로 남습니다.
그래서 청합니다. 넣어 주십시오.
이 시대에 굳어 가는 제 마음에도,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십시오.
성 베르나르도 역시 자신의 시대의 불의 앞에서, 세상을 향한 비판이 아니라 먼저 자기 마음을 하느님께 내어드리는 데서 삶을 시작했습니다.
이 청원은 체념이 아닙니다. 스스로는 이 마음을 고칠 수 없다는 정직한 인정에서 시작되는, 가장 근본적인 저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