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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골롬반 문서 탐구3: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골롬반외방선교회에 미친 영향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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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롬반 문서 탐구 · 3]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골롬반외방선교회에 미친 영향 (2) - 한국 선교 60년(1933~1993)의 활동을 중심으로 -
‘연대(Solidarity)’에 관한 총회1)
1982년 총회는 아일랜드의 골롬반 선교회 본부가 발전해 나가는 방식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었다. 이전 총회가 ‘가난한 이들의 해방’을 위한 활동을 언급했던 반면, 라틴 아메리카 리마(Lima)에서 열린 이 총회에서는 ‘가난한 사람들과의 연대’를 촉구하였다. 다시 말해 이 총회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일하는 것’보다는 ‘그들과 함께 일하는 것’을 강조하였다. 복음화는 가난한 사람의 관점에서 실행되어야 했다. 그럴 때 선교사의 임무는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배우고,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그들의 노력을 지원하며,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었다.
두 번째로 중요한 주제는 지역 성소(聖召)의 수용이었다. 그때까지 골롬반 선교회 지원자들은 아일랜드, 영국, 미국, 호주, 뉴질랜드와 같은 영어권 국가들에서만 선발되었다. 이제는 골롬반회 사제들이 일하고 있던 나라들과의 연대 표시로 비영어권 국가들에서도 지원자들을 받아들일 때가 되었다고 결정하였다. 세 번째 제안은 선교회가 평신도 선교사 프로그램을 시작하기 위해 더 적극적으로 조처하자는 것이었고, 평신도 선교사들을 독립적으로 모집하자는 제안까지 나왔다. 지역 성소와 평신도 선교사들을 받아들이기로 한 이 결정의 가장 혁신적인 측면은 선교 활동에 참여할 새로운 인력을 초대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그것이 선교회 자체의 성격에 있어서 의미했던 변화에 있었다.2)
선교회가 자체적으로 운영한 최초의 새로운 프로그램은 해외 훈련 프로그램이었다. 이것은 선교 국가에서 지원자들이 3년에 걸친 현장 체험을 하게 하고, 이를 감독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이 선교적 삶에 자격을 주는 것이 무엇인지, 또 선교를 위해 스스로 어떻게 준비할 필요가 있는지에 대한 더 나은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게 하였다. 이 프로그램을 운영한다는 것은 감독과 영적 지도 임무에 회원들을 임명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 독특한 골롬반 프로그램은 1978년에 시작되었으며, 같은 해 첫 OTP(Overseas Training Program. 해외 훈련 프로그램) 학생들이 한국에 왔다. 이어서 현지 성소 프로그램이 1985년에 한국에서 시작되었다. 이를 위해 후보자 모집, 지도, 교육 업무에 골롬반회 인력과 자원을 할당하여야 했다. 이 역시 고유한 골롬반회 프로그램이었다. 다음으로 평신도 선교 프로그램이 시작되었는데, 이 프로그램은 6개월간의 오리엔테이션을 거쳐 1990년에 첫 6명의 평신도 선교사를 필리핀에 파견하였다. 구성 인원과 자원의 활동력을 교구 봉사에 집중하던 선교회에서 그 자신의 이름으로 자체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선교회로 전환한 것은 큰 변화였다.3)
골롬반회원들의 새로운 우선 사항4)
1993년, 한국에서 골롬반 외방선교회가 한국 진출 60주년을 기념하였을 때, 한국에서 선교회 존재의 한 단계가 끝나고 새로운 단계가 시작되고 있음이 분명했다. 이러한 변화의 많은 부분은 새로운 한국의 상황, 즉 이제 수많은 한국인 사제와 수도자들이 있게 된 것에 기인하였다. 동시에 많은 새로운 계획들은 더 넓은 세상의 교회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더 깊은 인식을 하고 있었던 1982년 총회의 지시를 따랐다. 즉, 라틴 아메리카의 가난한 사람들과의 연대,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토착화, 그리고 국제 정신을 함양할 필요성 등에 대한 인식이었다. 선교회가 창립자 갤빈(E. Galvin)과 블로윅(J. Blowick) 시대 이후로 극적으로 변화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던 한편, 골롬반회원들의 다수는 그 혁신들이 원래 정신의 논리적 발전이었다고 느꼈다.
골롬반회원들의 경험 평가하기6)
시간이 지나면서 한국에서의 첫 60년 동안 골롬반회 사제들의 활동은 다양한 관점에서 평가될 것이다. 가령 파리외방전교회가 한국에 처음 왔을 때인 1836년(모방 신부가 입국한 해)과 골롬반회 사제들이 한국에 도착했을 때인 1933년 사이에, 파리외방전교회의 사목 방침과 교육 방식에는 거의 변화가 없었다. 그 시기는 교회의 부동성과 보존의 때였고, 이 시기의 사람들은 혁신을 의혹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변화하는 세상이나 변화하는 사회에서 선교사들이 더 적합한 방법이나 다른 사고방식을 채택하라는 요구는 없었다. 교회는 교회의 가르침과 제도가 보편적이고 영원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변화하거나 적응할 필요성을 거의 느끼지 못하였다. 오히려 그들은 현지의 종교 사상이 교회의 삶 속으로 몰래 다가와 교회를 타락시키지 않도록 조심하여야 했다. 한편 골롬반회원들이 한국에서 보낸 첫 60년의 요구는 달랐다. 한국의 문화적 상황이 독특한 대응을 요구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는 전 세계적으로 종교적·문화적 변화가 큰 시기였다. 새 시대가 요구했던 새로운 접근법 중 많은 부분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의해 지적되거나 요구되었다. 하지만 독특한 한국적 상황이 정확하게 요구했던 것을 그 누구도 뚜렷하게 보여주지 못하였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그 어떤 교회 회의도 무엇이 변해야 하는지 혹은 어떻게 해야 변화가 성취될 수 있는지를 제시하지 않았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민족의 문화들에 마땅한 주목과 감수성을 언급했던 한편, 1975년이 되어서야 교황 바오로 6세는 「현대의 복음 선교」7)에서 문화의 복음화에 관해 말하기 시작하였다. ‘토착화’ 혹은 ‘문화화(inculturation)’라는 말이 공식적인 교회 문서에서 처음으로 사용된 것은 1979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서였다.8)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문서들이 경제적·사회적·정치적 문제들에 관한 교회의 책임을 처음으로 언급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공의회는 ‘세상 속의 교회’에 대한 진술에서 그러한 책임을 핵심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이 때문에 우리는 한국에서의 첫 60년 동안, 특히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골롬반회원들이 선교사로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도전에 직면했다고 말할 수 있다.9)
1. 새로운 교회 : 세 가지 도전 중에서 골롬반 회원들이 가장 자신 있게 대처한 도전이 변화하는 교회에 대한 것이었음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들은 전례를 개혁하고, 성사들을 집행함에 있어 한국어를 사용하는 것에 관한 공의회의 가르침을 신속하게 따랐다. 그들은 점차적으로 본당 조직에 변화를 가져왔다. 본당 평의회들을 설립했고, 본당들이 재정적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그들은 또한 교구민들에게 교회에 관하여, 구원에 관하여, 그리스도에 관하여,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에 관하여 새로운 이해를 전달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들은 새로운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새로운 사도직 그룹을 만들었다. 젊은이 그룹, 레지오 마리애, JOC(가톨릭노동청년회), 여성 그룹, 매리지 엔카운터(M.E., Marriage Encounter), 알코올 중독자와 도박꾼을 위한 모임, 반 모임 등등. 동시에 한국의 골롬반회원들은 그 자신의 목표와 의제들을 가진 선교 단체로서 자신들의 자율성에 새로운 자신감을 보였다.
3. 변화하는 문화 : 골롬반회원들이 솔선해서 하기에 가장 역량이 없다고 느꼈던 분야는 토착화 분야였다. 한국 주교들이 그들 자신의 토착화 연구위원회를 설립한 것은 1987년이 되어서였다. 그때까지 골롬반회원들은 지역 교회 대부분의 선교사와 마찬가지로 문화 및 다른 종교 분야에 특화된 훈련을 거의 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골롬반회는 1976년 총회가 시작되면서부터 “선교사 사도직에 영감을 주신 성령께서 이미 선교사들이 가는 사람들과 문화 안에서 신비롭게 일하고 계십니다.”라고 하면서 토착화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었다. 또한 토착화의 목적과 성격의 일부는 선교사들 자신의 문화가 아닌 다른 문화에 복음을 구현하는 것이라고 명시하였다. 이러한 정신에서 골롬반회 한국지부는 1984년 서울에 토착화연구소를 설립할 것을 제안했다. 연구소의 목적은 토착화와 비그리스도교 종교들과의 대화 문제를 전문적인 연구 수준, 신학적 성찰과 사목적 적용의 수준에서 지속적으로 연구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목표들을 달성하는 수단으로서 『토착화』라는 계간지가 1986년 8월에 창간되었던 것이다. 이 잡지에는 한국 문화, 종교 간 대화, 선교의 측면들에 대하여 한국인들과 외국인들이 영어로 쓴 글들이 게재되었다. 1991년에 이 잡지는 「토착화, 한국」이라는 뉴스레터로 대체되었다. 한국의 종교, 문화, 사회의 상호 작용에 관해서 한국인들이 쓴 글과 뉴스 보도들을 번역하여 해외 교회에서도 읽을 수 있도록 도왔다. 이 연구소의 또 다른 목표는 한국 문화의 복음화에 적극적으로 기여하는 사람들을 발굴하고 격려하는 것이었다. 또한 한층 더 그리스도화될 필요가 있는 한국 문화의 측면으로 한국 가톨릭인들의 관심을 끌어내고자 노력하였다.10)
미래11)
1992년 11월 한국에 있는 골롬반회원들은 그들의 선교 목적, 한국의 상황, 회원들의 감소하는 수를 고려하면서 앞으로 우선순위로 두어야 할 분야를 식별하려고 노력했다. 그들 노력의 상당 부분이 성소 지도, 양성과 같은 내부 프로그램으로 가야 한다는 점이 인정되었다. 선교 교육과 『변방 선교』를 통해 한국 선교에 더 깊은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또 다른 우선순위로 여겨졌다. 한국 사회에서 선교의 새로운 도전은 도시 빈민과의 연대, 토착화, 평신도 선교, 정의와 평화 문제로 인식되었다. 오늘날의 교회와 세상에서 골롬반회원들의 역할을 분명히 하는 데 추가로 도움을 주었던 것은 1990년 12월 7일에 반포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회칙 「교회의 선교 사명(Redemptoris Missio)」이었다. 여기서 교황은 상당히 자세하게 오늘날 선교의 다양한 요소와 과업을 설명했고, 일부 신생 교회들과 탈(脫)그리스도교화된 문화에는 타당한 선교적 필요가 있는 한편, 만민에 대한 선교는 그것이 교회 임무와 역사의 중요한 부분임에 따라 잊히거나 소홀히 되어서는 안 될 독립적이고 긴급한 필요임을 주장하였다. 비(非)그리스도교 문화들을 복음화하는 것이 긴급하다는 이 주장은 지역 성소 프로그램과 평신도 선교 프로그램들에 자극을 주었다. 이는 아시아 복음화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 한국 신자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역사의 교훈12)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렸던 1960년대 초중반 이후로 삶, 사회, 종교의 거의 모든 측면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변화’가 혼란의 주요 원인이기 때문에, 특히 선교사들은 문화, 사회학, 종교사 분야의 발전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했다. 더 이상 선교사가 되기 위해 복음을 해외로 전파하기만 하면 된다고 말할 수 없었다. 현대의 선교적 임무는 기본적인 선교 원리에 대한 지식, 문화적 차이에 대한 깊은 감수성, 사람들의 현재 필요를 파악하는 능력, 풀뿌리 차원의 소규모 공동체에서 일할 수 있는 기술이 필요하였다. 선교사는 또한 가난한 이들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아야 했다. 더욱이 현대의 선교는 부족한 선교 자원이 가장 필요한 곳에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사용되도록 주의 깊은 조사와 계획이 필요하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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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글은 「골롬반 문서」 17(Hugh MacMahon, “The Missionary Society of St. Columban : Its Mission and Future in Korea”, 1993), pp. 410~411의 내용을 부분적으로 인용하였다. 2) 위의 문서 17-410~411. 3) 위의 문서 17-411. 4) 이 글은 위의 문서 17-412의 내용을 부분적으로 인용하였다. 5) 1991년 여름호로 창간된 『변방 선교』는 2011년 가을호(통권 80호) 때 『골롬반 선교』로 제호를 바꾸었다. 6) 이 글은 「골롬반 문서」 17(MacMahon, “The Missionary Society”, 1933) pp. 412~415의 내용을 부분적으로 인용하였다. 7) 「현대의 복음 선교(Evangelii Nuntiandi)」는 성 바오로 6세가 1975년 12월 8일에 반포한 교황 권고이다. 8) 성 요한 바오로 2세의 교황 권고인 「현대의 교리교육(Catechesi Tradendae)」으로, 1979년 10월 16일에 반포되었다. 9) 「골롬반 문서」(MacMahon, “The Missionary Society”, 1993), 17-412~413. 10) 위의 문서 17-414~415 11) 이 글은 위의 문서 17-415~416의 내용을 부분적으로 인용하였다. 12) 이 글은 위의 문서 17-416~417의 내용을 부분적으로 인용하였다.
[교회와 역사, 2024년 8월호, 글 전경미 체칠리아(한국교회사연구소 특임연구원)] 0 63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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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총회의 결실이 곧 한국에서도 나타나게 되었다. 1983년 두 명의 골롬반회원들이 사목적 의무감을 지니지 않은 채 신림동 ‘산 동네’로 이사해 그곳 사람들과 함께 살았다. 이런 일은 1992년까지 다양한 골롬반회원들에 의해 계속되었다. 다른 골롬반회원들은 노동자, 알코올 중독자, 도박꾼, 부부, 그리고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위한 봉사에 참여하였다. 가정 상담소와 종교 상담소도 개설되었다. 골롬반 토착화 연구소가 1984년 서울 왕십리에 문을 열었고, 연구소는 1986년부터 『토착화(Inculturation)』라는 계간 잡지를 발간하였다. 1991년에는 선교 잡지 『변방 선교(Frontier Mission)』5)가 창간되었다. 이 시기에 한국에 있는 골롬반회 신부들의 수는 감소되고 있었다. 은퇴하는 사제들과 새로 오는 젊은 사제들의 수가 적었기 때문인데, 1969년 150명의 신부가 1993년에는 65명으로 크게 줄었다. 골롬반회원들이 일하는 본당 수 또한 현저히 감소하였는데, 이는 특수 사도직 그리고 선교 교육, 성소, 영적 지도, 양성, 선교 잡지, OTP 및 평신도 선교와 같은 골롬반회 직무에 더 많은 사제들이 임명되었기 때문이다.
2. 새로운 사회 상황 : 한국의 새로운 사회적·정치적 도전을 골롬반회원들은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 자신의 주도라기보다는 한국 주교들과 성직자들의 주도를 따랐다. 그들은 외국인들로서 한국 문제에 간섭하는 사람으로 보일 수 있다는 점을 의식하였다. 또한 그들은 복잡한 경제적·정치적 문제를 다룰 때는 자신들의 언어와 이해의 한계를 인식했다. 그러나 주도적인 조치도 취해졌다. 지학순 주교 사건과 광주 민주화운동으로 많은 골롬반회원들이 체포되었고, 어떤 회원들은 체류 비자가 취소될 것이라고 협박을 받았다. 또한 1977년부터 정의 평화 담당자가 임명되어 이 문제들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세상의 교회들에 계속 관련 정보를 제공하였다. 그들은 신림동 산동네 같은 곳에 거주함으로써 그리고 밥 스위니(Bob Sweeney) 신부의 대전에서의 농촌 사도직과 같은 직무를 통하여 교회의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을 실천하고자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