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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천주교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 30년사 편찬사업 구술채록1: 북한선교가 아닌 민족화해인 이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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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 30년사 편찬사업 구술채록 · 1] 북한선교가 아닌 ‘민족화해’인 이유
한국교회사연구소는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 30년사』 간행에 앞서, 민족화해위원회(이하 민화위) 역대 위원장 및 위원 등을 모시고 민화위 설립 배경부터 방북 및 대북지원 과정, 앞으로 나아갈 발전 방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로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그 결과물인 이 구술채록문은 민화위 30년사에 수록될 예정이고, 그 일부를 이 지면을 통해 소개하고자 한다. 흔쾌히 인터뷰에 응해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린다.
• 구술자 : 노길명(세례자 요한) 한국교회사연구소 고문, 조광(이냐시오) 한국교회사연구소 고문 • 면담자 : 이민석(대건 안드레아) 책임연구원 • 일 시 : 2024년 6월 5일(수) 오후 2시 • 장 소 : 한국교회사연구소 회의실
광복 50년을 맞은 1995년, 천주교 서울대교구는 분단의 벽을 허물고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민족화해위원회를 발족하였습니다. 두 분 선생님께서는 민족화해위원회 위원으로 어떠한 계기로 참여하셨는지 말씀 부탁드립니다.
조광 : 1994년 10월경이었습니다. 그때 김수환 추기경님이 내년이면 광복 50주년이 되는데, 교회 입장에서 어떤 일이 필요한가를 가볍게 물어보신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당시 제일 중요했던 문제가 남북 분단이라고 생각되어서 얘기 드렸더니 교구 차원에서 해보는 게 좋겠다고 하고, 당시 최창무 주교님한테 이 준비를 하라고 하셔서 그해 말부터 통일, 분단 극복 문제가 본격 거론되기 시작했습니다. 실은 그 이전에 1989년 겨울이었습니다. 그때 강원용(1917-2006) 목사님이 하시던 ‘아카데미 하우스’에서 5대 종단 대표들이 모여서 민족통일 문제 그리고 그밖에 현 사회에 대한 종교계의 견해에 대해서 성명을 발표해야 하지 않겠냐고 김수환 추기경님을 찾아뵙고 요청하신 적이 있습니다.
조광 : 김수환 추기경님께서는 대외문제는 총대리 김옥균(1925-2010) 주교님이 관장하니까 가서 의논하라고 해서, 강원용 목사님이 김옥균 주교님을 찾아갔다고 합니다. 이건 내가 강원용 목사님한테 직접 들었던 건데, 난 김옥균 주교님하고는 별로 상관이 없었던 사람인데 왠지 그냥 이름이 거론되다가 나왔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천주교 대표로 가라고 해서 5대 종단 모임이, ‘아카데미 하우스’에서 3박 4일을 같이 합숙하면서 열렸고, 거기에서 성명서도 발표가 된 적이 있습니다. 89년도 성명서가 민족화해문제를 논할 때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이 되는데요. (중략) 그때 성명서 초안을 어떻게 하다 보니 내가 맡으라고 해서 쓰게 됐던 거였죠. 그 초안을 쓸 때 ‘민족화해’라고 하는 개념을 사용해야 한다는 걸 설득을 해서 초안에 ‘민족화해’라고 하는 용어가 들어갔었습니다.
조광 : 그래서 추기경을 1994년에 뵀을 때, 북한선교 개념과 민족화해 개념에 대해서 여러 가지 생각을 얘기 드렸던 거고, 나중에 그렇게 해서 민족화해라고 하는 개념이 형성돼 있던 상황에서 94년도에 이 일에 관여가 되었던 거였죠. (중략) 그 당시에 무슨 의견이 나왔느냐면 북한선교위원회가 있는데 왜 민족화해위원회냐, 이게 그때 장덕필 신부도 그랬고 여러 신부님이 여기에 대해서 그냥 북한선교부를 강화하는 형식이면 어떤가 하고 얘기를 했었죠. 그런데 북한선교라고 하는 건 북한 인민들을 객체화시키는 작업밖에 안 되고, 북한의 역사서나 모든 책을 보자면 선교사는 제국주의 주구 노릇을 한 거로 표현돼 있는데 굳이 그쪽에서 싫어하는 그 용어를 쓸 수는 없다. 그리고 우리에게 필요한 건 통일이라고 하는 개념보다는 지금 분단된 민족들이 화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해서 몇 가지 제목을 내가 다섯 가진가를 제시해서 거기에서 선정해달라고 최창무 주교님에게 드렸고, 최 주교님이 추기경님한테 드렸는데 추기경님 입장에서는 전에 들었던 바도 있고 해서 그랬는지 최종적으로 민족화해위원회라고 낙점을 찍어 줬습니다.
북한선교부부터 민화위까지 선생님들께서는 위원을 역임하시면서 어떠한 역할을 하셨고, 특별히 기억에 남는 활동은 어떤 것이 있는지 말씀 부탁드립니다.
노길명 : 조 선생님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북한선교라고 하게 되면 북한지역은 우리하고는 다른 하나의 상대 내지는 타자라고 하는 의미가 들어갑니다. 그런데 북한에 있는 교회, 평양교구나 함흥교구나 덕원면속구 그리고 경기도 북부 지역과 황해도 지역은 서울대교구에 속해 있습니다. 그럼 평양교구나 함흥교구나 황해도를 중심으로 한 서울대교구, 덕원면속구는 다른 나라 교구가 아닙니다. 한국 천주교 안에 속한 교구입니다. 이렇다고 했을 때 북한을 선교의 대상으로 본다는 것은, 그 자체가 어폐가 있는 겁니다. 이런 의미에서 북한선교라고 하는 말이 적합하냐는 논의가 북한선교부 시작할 때부터 있었습니다.
노길명 : 여기에서 특히 서울교구를 중심으로 해서 활동하는 분들은 북한선교라고 하는 게 아니라, 더욱더 큰 차원으로 우리 사회의 근본적인 모순인 분단문제 극복을 해나가야 하겠고, 또 복음화라고 하는 것도 결국 사랑, 정의, 평화가 넘치는 세상을 이룩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 민족화해 문제에 우리의 관심을 모아야 할 것이 아니냐 하는 인식들이 저변에 깔려 있었습니다. 바로 이런 상황 속에서 서울교구는 북한선교부를 민족화해위원회로 바꿀 수 있었던 거죠. 그런 인식이 없었다고 한다면, 민화위의 출발은 조금 어려웠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래서 지금 질문하신 민화위 위원을 역임하면서 특히 기억에 남는 활동이 뭐냐고 하셨는데 제 경우에는 두 가지를 지적하고 싶습니다. 하나는 당시 1990년대 중반부터 북한 사회는 소위 고난의 행군 시기라고 해서 여러 가지 재난, 자연재해 또는 구조적인 특성으로 인해서 북한 주민들 가운데 아사자(餓死者)들이 대량으로 발생하고 있다고 하는 뉴스가 국내외에서 크게 나오기 시작을 했습니다. 이때 민화위에서는 민족의 화해를 위한다고 한다면 또 우리가 복음 정신에 바탕을 둔다고 한다면 저렇게 아사자가 발생하고 있는데 우리가 그들을 도와야 하지 않느냐, 함께 해야 하지 않느냐는 이런 인식이 대두되기 시작을 했습니다.
조광 : 이제 북한선교위원회에서 민족화해위원회로 서울교구는 전환하는 데 별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주교회의 산하로 북한선교위원회가 있다 보니까 쉽게 전환이 안 되더군요. 그래서 민족화해라고 하는 개념 자체에 대해서는 다 동의를 하면서도 몇 년 걸렸어요. 이 민족화해위원회가 출발한 게 1995년 3월 1일입니다. 왜냐하면 삼일절이 우리 민족이 일으켰던 가장 큰 민족운동이었습니다. 그러면 민족화해를 위한 운동도 또 다른 민족운동의 의미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므로, 제2의 3.1운동과 마찬가지로 해야 한다고 해서 3월 1일에 북한하고 접촉했습니다. 그런데 이 당시 북한하고 접촉 루트는 중국 교회를 통해서 우선 시작을 했습니다.
조광 : 그다음에 이제 같이 기도하자 해서 이때 처음 만났을 때 결정이 됐던 건 기도문 세 종류를 만들었어요. 둘은 그냥 남북 화해를 위한 기도로 만들었던 거고. 하나는 프란치스코의 ‘평화를 구하는 기도’이지요. 그런데 장재언(조선카톨릭교협회 중앙위원회 위원장) 선생이 그 기도문을 보고 대단히 좋다고 해서 그걸 가지고 바치기로 해서 같이 남북 교회가 기도 운동부터 시작하자 했어요. (중략) 그다음에 이제 추기경님이 95년 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에 민족화해의 길이라고 하는 강론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강론 원고를 쓸 때 조금 도와드렸던 기억이 있는데요. 그리고 95년 4월 1일부터는 민화위 규약을 만들어서 추기경님한테 올렸는데 그 규약이 서명된 게 5월 28일입니다.
침묵의 교회라는 개념 문제도 조금 말씀을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노길명 : 이제 침묵의 교회는 1952년경. 비오 12세 교황께서 사용하신 용어였습니다. 공산권의 교회를 지칭하는 용어였는데, 이것이 우리 교회에 그대로 들어와서 주교회의에서 북한 교회를 위한 기도문을 만들면서 침묵의 교회를 위한 기도문이라고 명칭을 붙였습니다. 그것이 계속 통용이 되어 왔었죠.
조광 : 침묵의 교회라고 하는 용어 자체가 부적합하다고 판단을 내렸던 거고요. 그래서 이 침묵의 교회라고 하는 용어, ‘Church of Silence’가 뭐 그런 식의 표현도 나오고 했는데, 그것보다는 적극적으로 같은 신자로서 호흡을 같이할 수 있는 그러한 존재로 북한은 파악이 되어야 한다는 그 관점에서 침묵의 교회에 대해서 여러 사람이 그때 이의를 제기했던 거였죠.
1995년 10월 27일부터 11월 2일까지 미국 뉴저지주 포트 리(Fort Lee)의 앰배서더 호텔에서 ‘조국통일을 위한 천주교인의 역할과 남북 해외 천주교인의 연대 강화’라는 세미나가 있었습니다. 분단 후 남북한 천주교 신자를 비롯한 해외 신자들의 첫 만남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 세미나에 대해 전반적인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조광 : 그 준비는 세미나를 하자고 얘기가 나오고, 만나는 장소로 미국도 좋다. 어디든지 어디서든지 만나자 했던 것은 이미 95년 6월 북경에서 만날 때부터 그런 얘기가 됐던 거였습니다. 그런데 이때 준비는 주로 박창득(1935-2015) 신부님이 주선해서 미국에서 만나는 것으로 했습니다. 박창득 신부님은 그 이전에 빌리 그레이엄 재단(Billy Graham Evangelistic Association)에서 장재언을 미국으로 초청을 했던 적이 있는데, 그때부터 아마 안면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 세미나를 하기보다는 우선 남북한 교회가 만나야 할 필요성, 그리고 북한 교회의 현실, 현상이라고 할까, 이러한 문제들을 가지고 각자 발표를 했던 것이죠. (중략) 여기에서 제일 기억나는 건 장재언 선생이 왜 민족화해냐 해서 그걸 가지고 둘이서 한 시간 정도 얘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때 장재언 얘기로는 통일이라는 말이 좋은데 왜 통일이라는 말을 피하고 화해를 썼느냐 그랬는데, 내가 통일 제일 원하는 건 김일성 원수하고 이승만 대통령이었다. 그런데 그게 통일이 아니라 전쟁밖에 한 거 없지 않으냐, 남북한 사람 많이 죽었는데 그 통일은 목적 지향이었고 수단 방법에 대한 논의가 없었기 때문에 민족이 우리가 그렇게 된 거 아닌가, 그런 방향으로 대답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조광 : 그다음 해, 그러니까 96년 3월에 북경 켐핀스키 호텔(Kempinsky Hotel)에서 또 장재언을 만나서 추가 논의를 했던 적이 있습니다. 이때 장재언이 와서 아주 적극적으로 화해란 말이 좋다. 화해가 통일보다 더 상급개념이니까 그걸로 하는 게 더 좋겠다고 자기네들도 이제 의견의 합의를 봤다는 식으로 얘기를 해줬어요. 그래서 이 민족화해위원회가 사용했던 화해라는 개념은 우선 남한 사회에서는 통일이라고 하는 프레임을 화해라고 하는 프레임으로 바꾸는 데 기여를 했습니다. (중략) 그리고 98년도에 최창무 주교님 모시고 평양을 갔을 땐데 그때 우리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이 북쪽에서 민족화해협의회를 발족시켰어요. 민족화해협의회를 발족을 시켜놓으니까 우리가 도착하자마자 정보부에서 와서 가서 무슨 장난을 했느냐 해서 전혀 모르는 거다. 실제로 몰랐고요. 그런데 남쪽에서도 거기에 호응해준 겁니다. 그래서 민족화해협의회 남측본부가 만들어졌던 거죠. 북측본부하고 남측본부로 해서 공동사업도 그 후에 전개가 되고 그래서 북쪽에서도 통일이라고 하는 용어보다 화해라고 하는 개념으로 바뀌었다가 지금은 어떻게 됐는지는 또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그러니까 민족화해라고 하는 것을 북쪽의 교회 신자들도 그걸 이제 충분히 수용하고 같이 얘기를 나누는 계기가 됐던 거고 그 시작이 포트리 회의였다고 생각이 됩니다.
한국 천주교회의 대북지원 사업의 의미는 무엇일까?
조광 : 대북지원 사업이라고 하는 건 우리가 우월한 입장에서 거기에 남는 걸 준다기보다는 어떤 경우든지 같은 인간이고 같은 형제로서의 당연한 의무로 생각을 하고 같이한다는 그 자세가 필요할 겁니다. 그렇지 않고 우월감을 가지고 그들을 돕는다, 먹여 살린다 이런 식으로 했다가는 아주 단기간에 그게 끝나버리고 말 거예요. 지속해서 할 때는 참다운 인간을 기반을 둔 민족애라고 할까, 동포애라고 할까, 그게 결국 인간을 기반을 둬야 할 것이니까. 거기에 철저히 한다면 그게 바로 교회의 정신하고도 또 통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노길명 : 지금 조 선생님 말씀하신 것에 제가 첨언해서 말씀드린다고 하게 되면 제가 북한에 갔을 때, (중략) 관계자가 그런 얘기를 했어요. “남쪽에서 도와주면 가끔이나마 고맙다는 얘기라도 해라, 그래야 지금 남쪽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일하는 맛이 좀 나고 또 남쪽에서 도와주는 후원자들도 마음이 기쁠 것 아니냐” 그랬더니 “받는 사람의 입장은 생각 안 합니까? 받는 사람들은 자존심이 없는 사람들입니까? 강아지에게 먹이 주듯이 던져주는 것이 도와주는 겁니까?” 하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건 무슨 얘기요?” 그랬더니 “천주교는 그렇지 않습니다만, 남쪽에서 도와주는 단체들이 여기 와서는 뭐 남쪽 가게 되면 엄청나게 도와줄 것처럼 큰소리 빵빵치고 난 다음에 가서는 쥐꼬리만큼 보내주고 그리고는 돌아다니면서 북한을 위해서 도와줬다고 큰소리를 칩니다. 우리가 거렁뱅이인 줄 아십니까?” 거기서 느낀 점이 많았습니다. 우리가 꼭 가난한 사람들에게 먹이 하나 던져주는 식으로 오히려 우리가 그 위세를 떨고 도와줬다고 하는 자기만족에 빠지는 건 아닌가? 이게 정말 진정한 나눔인가? 나눈다고 했을 때는 그 사람들의 그 같은 심정이 돼야 하지 않느냐? 정말 동정이 돼야 하는데 그게 아니고 윗사람이 아랫사람한테 주듯이, 부자가 가난한 사람에게 먹이 하나 던지듯이 이건 아니다! 그래서는 화해가 될 수 없다는 생각을 제가 그때 하게 됐습니다.
조광 : 90년대 나온 교황청 문헌 중에서 바로 원조와 피원조 관계를 설명한 글이 있어요. 그걸 나도 인용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원조를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있어야 한다는 점이 거기에 나와 있었거든요. 우리가 북한을 돕는다 할 때도 바로 그 입장, 지금 노 선생님이 말씀하신 그 입장이 전제되어야지 올바로 도와드릴 수가 있을 것입니다.
노길명 : 민족의 화해라고 하는 것은 상대방과 나를 동등한 입장에서 놓고 얘기했을 때 화해가 될 수 있는 것인지 우열을 전제로 해서 이야기를 하게 되면 화해가 될 수 없죠. 그래서 우리가 화해의 얘기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마는 정말 진정한 화해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 복음에 바탕을 둬서 신학적으로 화해에 대한 그 개념적 정립이 제대로 돼야 할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중략) 화해에 대한 신학적인 근거, 역사적, 철학적으로 마련하는 것도 앞으로 민화위가 해야 할 일 중의 하나가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지금 민화위가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서 나아가야 할 방향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말씀을 주시면 저희가 집필을 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조광 : 집필의 목적 내지는 방향이 평화에다가 두어야 할 겁니다. (중략) 우선 평화교육 내지는 화해의 교육에서 교회가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평화교육, 화해 교육을 한다고 할 때, 단지 신자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게 아니라 전체 뭐 민족구성원이라고 할까? 이들 모두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방향의 교육 프로그램 마련이 현재로서 할 수 있는 일 중에는 제일 중요할 겁니다. 그리고 이걸 통해 이것과 더불어서 화해의 당위성에 대한 이론화 과정. 민족의 화해를 해야 한다는 거, 그 이론화 과정은 지금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분쟁하고 있는 남북한에 화해, 평화문제 그것을 연구하는 데 앞장을 서는 것이 지금 현 입장에서 민화위가 해야 할 중요한 작업이라고 보입니다.
노길명 : 저도 같은 생각인데요. 최근 남북관계가 굉장히 경직화되고 있죠. 남측의 지도자도 그렇고 북쪽의 지도자도 그렇고 서로가 그냥 강경한 발언들만 쏟아 내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는 정말 민족화해라고 하는 것은 점점 어려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 민화위의 활동은 북한지역을 대상으로만 할 운동을 할 게 아니라 국내에서도 왜 우리가 민족화해를 해야 하느냐 하는 것을 제대로 알리고, 우리나라의 정치 지도자를 비롯한 사회 각계각층에 대해서도 민족화해에 대한 홍보 활동을 강화하고, 예언자적인 기능을 강화해 나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정치적으로 어렵다고 해서 화해 운동이 주춤하면서 멈출 때 아니라, 이 화해를 저해하는 요인들을 타파하기 위한 노력을 민화위가 앞장을 서야 할 것이고, 또 이 남북 간의 관계라고 하는 것은, 남북 당사자들뿐만이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얽혀져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민족의 화해를 위해서는 평화를 위해서 활동하고 있는 외국단체들과 같이 협력하고 연대할 필요가 있고, 서울대교구의 활동이 제대로 되기 위해서는 우리 한국교회에서 타 교구와의 연대도 강화해나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민화위는 그동안 많은 활동을 통해서 축적된 경험이 있을 것이고 또 시행착오도 갖고 있을 겁니다. 그 시행착오들을 수정하면서 쌓아온 경험들을 잘 분석하면, 그 안에서 여러 길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오늘 선생님들과의 대화에서 가장 키포인트는 ‘민족화해’로, 저희가 집필하는 데 조금 더 강조해서 기술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럼 이것으로 노길명, 조광 선생님의 구술 채록을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노길명, 조광 : 네, 감사합니다.
[교회와 역사, 2024년 9월호, 글 이민석 대건 안드레아(한국교회사연구소 책임연구원)] 0 82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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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길명 : 네, 민족화해위원회는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1982년에 설립된 북한선교부를 확대, 개편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북한선교부의 설립 때부터 활동하였는데, 그것이 민화위에 계속 참여하게 된 이유가 아닌가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