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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골롬반 문서 탐구4: 골롬반 문서로 보는 한국교회의 성장과 교구 분할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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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27 ㅣ No.1769

[골롬반 문서 탐구 · 4] 골롬반 문서로 보는 한국교회의 성장과 교구 분할 (2)


- 한국 선교 60년(1933~1993)의 활동을 중심으로 -

 

 

대목구 시대, 교회의 확장

 

1955년 9월 20일 춘천지목구가 대목구로 승격되고, 지목구장 토마스 퀸란(Thomas Quinlan) 신부가 춘천교구 최초의 주교가 되었다.1) 아일랜드의 골롬반회 본부는 퀸란 주교에게 축하 서신을 보내면서, 목포지목구보다 5년 늦게 출발한 춘천지목구가 먼저 대목구로 설정된 데 대한 설명을 요청하였다.2) 이에 퀸란 신부는 교황청이 교황사절인 자신의 지위를 올리기를 원한 것으로 보이며, 그 방법으로 춘천을 대목구로 만들었다면서, 목포와 다른 지목구의 지위도 곧 오르게 되기를 희망한다고 답하였다.3) 메리놀회 회장과 노기남 주교, 라리보 주교는 로마로 편지를 보내 메리놀회 신부들이 일하고 있는 지목구와 대전 등의 대목구 승격을 제안하였다.4)

 

1957년 1월 21일 광주지목구가 대목구로 승격되었고, 그해 5월 11일 하롤드 헨리(Harold W.Henry) 신부가 광주대목구의 주교로 서품되었다. 1958년 당시 한국에 8개 대목구(서울, 대구, 전주, 춘천, 부산, 광주, 대전, 청주) 중에서 네 곳의 대목구가 외국인 사제들의 책임 아래 있었다. 퀸란 신부는 골롬반회 본부에 “한국에 있는 외국인 주교 시대가 얼마 남지 않은 듯하며, 해롤드 헨리가 마지막으로 임명된 주교가 될 듯하다. 몇 년 후에는 한국인 주교를 세우기 위해 그와 나에게 물러나 달라고 요구하게 될 가능성도 있다”고 알렸다.5) 퀸란 주교는 교황사절의 임무를 끝낸 후 춘천대목구 주교관으로 돌아가 주교관 준공과 효율적인 신자 교리 교육 등 대목구의 활성화에 전력을 기울였다.6) 그리고 신자 교리 교육을 담당할 수녀 양성을 위해 춘천에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수련원을 지었다.

 

패트릭 버크(Patrick J. Burke) 신부는 골롬반회에 제출한 <1959년 한국교회 전망에 관한 보고서>에서 ‘1954년부터 1958년까지 한국의 가톨릭 신자는 189,385명이 증가하여 두 배 이상 증가’했고, ‘1958년 6월 30일까지 한국에 225개의 본당과 1,000여 개의 공소’가 있다고 보고하였다.7) 헨리 주교도 “지난 2년간 광주대목구에 8개의 새 본당과 48개의 공소가 세워졌고, 20,584명의 성인이 세례를 받고 약 15,000명의 예비신자가 등록하였으며, 아직 사제가 거주하지 않는 10만 명 이상의 인구를 가진 6개 지역 중 3개 지역에 본당이 들어설 땅을 최근 구입하였다”고 보고하였다. 헨리 주교는 당시 인구 16명당 1명이 가톨릭 신자로, 한국에서 가장 신자가 많은 도시인 목포에 오겠다는 선교회에 학교 부지를 무상으로 제공하기로 결정하였다.8) 또한 ‘서울에 이어 두 번째로 선택된 광주의 신학교 설립을 위해 8에이커(약 32,374㎡)의 땅을 확보하였고, 1960년 봄에 200명 학생을 수용할 건물 신축에 착수하기를 희망하였다. 헨리 주교는 1959년 대학생과 고등학교 졸업생 중에 성직자가 되겠다는 소명을 표한 숫자가 31명으로 증가했다’고 보고하면서 가톨릭 학교의 부족이 대목구의 주요 어려움이라고 하였다.9) 한편 1960-61년 한국 전체에서 세례자 수가 많이 감소한 데 대해, 헨리 주교는 ‘신자를 돌볼 사제 숫자가 너무 부족하고, 두 번의 혁명(4.19와 5.16)이 일어난 결과 사람들의 마음이 혼란하고 불안하며, 경제 상황의 악화로 매일 끼니를 걱정하는 상황’을 설명하였다. 또 냉담자 숫자도 다소 증가하였는데 이는 ‘한국전쟁 때부터 1959년 2월까지 제공된 구호물자를 바라고 교회에 들어온 신자 다수가 빚을 지고 숨어버려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고 하였다.10)

 

 

교계제도 설정과 새로운 교구 설립

 

1962년 3월 10일 천주교회에 교계제도(敎階制度)가 설정되어 대목구가 정식 교구로 승격되고, 서울·대구·광주대교구를 중심으로 3개 관구가 설정되었다. 1960년대 천주교 신자의 증가와 교세 확장에 따라 1962년 수원교구와 인천교구가 설립되는 등 기존 교구들은 점차 분할되어 새로운 교구들이 형성되었다.

 

광주대목구가 광주대교구로 승격되면서 하롤드 헨리 주교가 대주교로 승임하였고, 동시에 신학교(現 광주가톨릭대학교)가 설립되었다. 헨리 대주교는 1963년 6월 교황청 포교성성에 ‘광주신학교가 1962년 4월 첫 신학생들을 받았고, 1963년 3월부터 미국 위스콘신주에서 온 예수회 신부들이 지도하는 79명의 학생들이 철학과 라틴어를 공부하고 있다. 신학교의 채플을 짓기 위한 자금이 부족하여 모금을 하고 있다’고 보고하였다.11) 1963년 3월 헨리 대주교는 골롬반회 총장 신부에게 ‘새 교황사절이 광주대교구의 분리를 언급했고, 교구에서 분리할 지역을 원하는 멕시코 외방선교회의 총장 주교가 방문할 예정’이라고 알렸다.12) 헨리 대주교는 1963년 7월 6일 멕시코 과달루페 선교사들이 광주대교구의 약 삼분의 일의 영토를 인수하기로 과달루페선교회 총장 에스칼란테 주교와 동의하였다. 과달루페 선교사들이 1963년 9월에 두 명, 1964년 2월에 네 명, 1966년까지 열일곱 명이 더 들어오기로 하였다.13)

 

1965년 8월 15일 헨리 대주교는 포교성성에 보낸 보고서에서 ‘광주대교구는 골롬반회 사제들의 열정과 지원으로 발전할 수 있었으며, 교황청의 재정적 지원을 받은 광주신학교가 1962년 4월 첫 학생을 받은 이후 상당한 진전을 이루어 1965년 3월 59명이 입학하여 재학생이 108명’이라고 하였다. 또한 한국인 수녀의 숫자를 늘리기 위해 한국으로 데려온 일본 미야자키의 카리타스 수녀 공동체가 소명자를 배출하였고, 미국 서부지역 예수고난회(Passionist) 신부들이 와서 평신도와 사제들을 위한 피정센터를 열기로 하였으며, 살레시오회와 씨튼 자선수녀회의 활동 등 사제들과 수도자들의 사도적 열정과 성과를 알렸다.14)

 

 

춘천교구에서 원주교구가 분할되다

 

1965년 2월 22일 춘천교구가 정식 교구로 된 지 3년 만에 교황령에 의해 원주교구가 분리·설정되었다.15) 춘천교구의 분할을 처음 제의한 것은 퀸란 주교이다. 그는 분할 지역을 골롬반회 사제가 아닌 한국인 사제가 책임을 맡도록 제의하였다. 춘천교구는 공식적으로 계속 골롬반 선교회에 위탁되어 골롬반회 선교 사제 34명이 사목하였고, 11명의 골롬반회 사제가 분할된 원주교구에 배속되어 활동을 시작하였다. 초대 원주교구장은 지학순(池學淳) 다니엘 주교가 임명되었다. 이로써 골롬반회 회원들이 한국인 주교와 처음으로 손을 맞잡고 일하게 되었다. 그후 많은 골롬반 회원들이 새로 한국에 파견되었다. 아일랜드의 골롬반회 총장은 춘천교구에 인적·물적 자원을 쏟아부은 자신들이 원주교구 분할 소식을 공식적으로 전달받지 못했음을 언급하였다. 하지만, 골롬반 참사회는 교구 분할 제의가 골롬반회 퀸란 주교로부터 비롯되었기에 포교성성에서 당연히 본부도 알고 있다고 여겼을 것이고, 교구 분할은 포교성성의 일이며, 골롬반회는 포교성성 아래 있는 선교수도회이므로 어떠한 항의도 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16)

 

원주교구 지학순 주교는 1965년 12월 1일 퀸란 주교를 방문하여 골롬반회에 더 많은 사제와 기금 지원을 요청하였다. 퀸란 주교는 매년 추가로 사제 한 명을 제공하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하겠으며, 교리교사의 급여는 1966년 6월 말까지, 수녀의 월급은 1967년 6월까지 지급할 것이며, 원주교구 내 한국인 성직자들의 유지비를 1967년 6월까지 계속 지원하겠다고 약속하였다.17) 지학순 주교는 1966년 골롬반회 총장에게 보낸 편지에서 원주교구에 큰 역할을 하는 골롬반회가 있다는 것이 큰 행운이며, 아일랜드 골롬반회의 예산 지원과 도움에 감사를 표하였다.18) 1967년 골롬반회는 원주교구에 42,800달러의 보조금을 지급하였으며, 지학순 주교는 원주교구의 새 주교관이 완성되도록 건축비용의 절반을 분담하고, 미국에서 교구를 지원하도록 도움을 준 골롬반회와 사제들에게 감사를 표하였다.19)

 

1969년 5월 1일 한국천주교회의 관할 구역이 교황령에 의해서 재조정되어, 춘천교구의 강원도 횡성군과 평창군의 일부가 원주교구 관할로 이관됨에 따라 풍수원과 횡성, 평창 본당의 신자 6,000명이 원주교구에 속하게 되었다. 한편 서울대교구의 포천군과 가평군이 춘천교구에 속하게 되면서 포천과 청평, 가평 본당의 신자 2,500여명이 춘천교구에 편입되었다. 1970년 당시 춘천교구 사제 41명 중 골롬반회 사제는 29명이었다. 1972년 춘천교구와 골롬반회는 ‘선교사의 인사권 위임에 관한 계약’을 체결하여, 종전에 골롬반회 본부에서 가지고 있던 춘천교구에 부임하는 사제들의 인사권을 춘천 교구장이 행사하게 되었다.

 

 

광주교구에서 제주교구가 분할되다

 

1966년 6월 헨리 대주교는 포교성성에 ‘4백만의 인구를 가진 광주대교구는 영적으로나 재정적으로 효과적으로 관할하기에 인구가 너무 많다. 대교구의 분할은 이 지역에서 교회를 더 신속히 건설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가능한 빨리 목포와 제주 지역이 교구로 설립되기를 바란다’는 서한을 보냈다.20) 1971년 6월 광주대교구에서 제주특별자치도가 분리되고 제주지목구가 신설되었다. 제주의 초대 지목구장으로는 헨리 대주교가 광주대주교직을 사임하고 전임되었다. 한공렬 베드로 대주교가 헨리 대주교에 이어 광주대교구장이 되었으며, 골롬반회의 리처드 스테인힐버 총장신부가 골롬반회를 대표하여 축하 인사를 전하였다.21)

 

제주에는 1954년 4월 골롬반회 선교사로 한림본당에 부임한 맥그린치(Patrick James McGlinchey) 신부가 성 이시돌 목장을 설립해 축산 신기술을 전파하고 다양한 복지사업을 펼쳤으며22), 오랜기간 농장 건립에 애쓰고 큰 성과를 올린 맥그린치 신부는 1973년 제주도 명예도민증을 받았다.23) 제주지목구는 1977년 4월 제주교구로 승격되어 정식 교구가 되었다.

 

 

 

 

1970년대의 새로운 개척

 

1970년대 산업화에 따라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농촌에서 가톨릭 신자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대도시 특히 서울로 몰려들었으나, 서울의 교회들은 그들을 충분하게 돌볼 환경이 아니었다. 이에 서울의 추기경과 교황청 대사 대리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골롬반회가 주도적 역할을 하도록 격려하였다.24) 창립 50주년인 1968년 당시 골롬반회는 1,093명의 회원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한국에 두 개의 대교구와 두 개의 교구에서 140명의 회원이 활동하면서 춘천교구와 광주교구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본부로부터의 선교사 영입도 활발해져 1970년에는 골롬반회 인원이 153명까지 늘어났다. 1968년까지 서울에 2개의 본당25만을 맡고 있던 골롬반회는 1978년 무렵 서울에만 25개의 본당을 개척하였고, 인천교구(1970), 수원교구(1972), 안동교구(1973) 및 부산교구(1973)로도 진출하였다.

 

1960년대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한국인 사제가 늘어나면서 골롬반 선교사들은 교구 사제들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특수 사목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도시화 영향으로 발생되는 문제들에 대응키 위해 노동 사목, 야학 운영, 카운슬러, 병원 원목 등에 눈을 돌렸고 빈민 사목, 노인 복지, 장애인 복지, 피정 지도 등 분야에도 참여하게 되었다. 그 밖에도 학생 사목, 교리교사 지도, 매스컴 사목, 한국 문학의 영문 번역과 대학 강의를 통한 문화교류 등 다양하게 활동하였다. 이러한 다양화는 교황청으로부터 온 지침에 따른 것이다. 복음화의 책임이 선교회로부터 선교 지역의 주교에게로 넘어가게 된 지침에 따라, 골롬반 회원들이 다른 교구로 배속되는 것도 가능하게 되어 1977년에는 9개 교구에서 72개 본당을 맡았다.

 

 

골롬반회의 한국도래 50주년과 1980년대 선교의 다양화

 

1983년 김수환 추기경은 골롬반회 사제들의 한국도래 50주년을 축하하며, 골롬반회 총장에게 한국교회의 발전을 위하여 지칠 줄 모르고 일해온 골롬반회 250여명의 선교사들의 노력에 감사를 표하였다.26) 한편 1980년대 한국골롬반 회원은 10년간 숫자가 감소하거나 여러 지역에서 철수하였다. 1979년 안동교구에서, 1983년에 원주교구에서27), 1987년 부산교구에서 철수하였으며 다른 모든 지역에서도 그 수가 감소하였다. 춘천교구로부터 골롬반회 인력의 철수28)에 영향을 미친 요소는 교구 사제 수의 증가이다. 골롬반회 총장은 이러한 골롬반 사제 감소 추세는 지역 교회의 성장과 활력의 커다란 표시이며, 지역 교회 복음 전파와 가정생활의 성화, 정의와 인권 등을 위한 일에서 많은 선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고 평가하였다.29)

 

골롬반회는 1980년대에도 본당 사목뿐 아니라 새로운 선교가 추가되어 도시빈민, 단주 및 단도박 교육 프로그램, 토착화 연구, 노동사목, 생활상담, 유기농법 농사, 장애인들의 재활을 위한 프로그램 등으로 사도직을 다양화하였다.30)

 

특히 한국인 회원에 대한 양성을 시작하여 1985년 첫 그룹인 3명의 신학생이 입회하였다. 1989년에 발족되어 파견을 준비해왔던 평신도 선교사팀이 1990년에 필리핀으로 첫 선교를 떠났다.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한국 진출 60주년인 1993년에는 첫 골롬반 한국 회원이 사제품을 받고 해외로 파견되었다. 골롬반회가 한국에서 활동을 시작한 1933년 이후 한국 사회와 한국 교회가 변했고, 골롬반회도 역시 변화되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도 선교회 초기 선교사들의 좌우명 ‘그리스도를 위한 나그네’가 되어 하느님이 이끄시는 대로 고향을 떠나 다른 문화 속에서 복음을 전하며,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고, 정의를 위해 선교 활동을 펼치는 성 골롬반회의 선교 정신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

 

1) 「골롬반문서」 5 (Mgr. Thomas Quinlan, Regent Apost. 5-46, 1955.10.5).

2) 위의 문서, 5-47 (1955.10.11).

3) 위의 문서, 5-49 (1955.10.22).

4) 위의 문서, 8 (Chunchon, Development, 8-84, 1957.3.10).

5) 위의 문서, 8-84 (1957.3.10).

6) 위의 문서, 8-104~105 (1956.10.23.).

7) 1958년 골롬반회 총장으로부터 더 많은 선교 사제를 한국에 파견할 수 있도록 포교성성을 설득하기 위한 자료 제출을 요청받고 작성한 보고서이다. 「골롬반 문서」 23 (Korean Reports-P.O’Connor 1950+, 23-130, 1959).

8) 위의 문서, 23-143 (1959).

9) 위의 문서, 2 (Kwangju-Spiritual returns, 2- 66~67, 1959.7.10).

10) 위의 문서, 2-59~61 (1961.6).

11) 위의 문서, 2-5~8 (1963.8.10).

12) 위의 문서, 27 (Kwangju, Guadalupe Frs. 27-22, 1963.3.3).

13) 위의 문서, 27-1 (1963.7.7).

14) 위의 문서, 2-85~89 (1965.8.15).

15) 춘천교구는 1962년 7월 26일 퀸란 주교의 교구장 착좌식을 주교좌 죽림동 성당에서 거행하였다. 

16) 「골롬반문서」 1 (No Title, 1-21, 1964.11.5); 1–18 (1964.10.30).

17) 위의 문서, 4 (Bishop of Wonju:1965-1972, 4-4, 1965.12.1). 1966년 2월 12일 퀸란 주교는 사임을 청하였다. 교황청은 부주교인 스튜어트(Thomas Stewart, 朴, 1925~1994) 신부를 5대 춘천 교구장이자 두 번째 주교로 임명하였다.

18) 위의 문서, 4-7 (1966.2.14); 4-9 (1966.7.5); 4-10 (1966.7.20).

19) 위의 문서, 4-13 (1967.8.20); 4-16 (1967.11.27).

20) 위의 문서, 15 (Kwangju :1964-1967, 15-85, 1966.6.15)

21) 위의 문서, 16 (Kwangju: 1968-1971, 16–73, 1971.8.11).

22) 위의 문서, 10 (Cheju House & Project 10-38~116, 1968~1988).

23) 맥그린치 신부는 1962년 11월부터 2011년 11월까지 제주도 이시돌 대표를 역임하였다. ‘아시아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막사이사이상을 비롯해 적십자상, 제주도문화상 등을 받았고, 2014년에는 한국에서 반세기 넘게 선교와 사회사업에 몸 바친 공을 인정받아 고국 아일랜드의 대통령상을 받았다.

24) 「골롬반문서」 24 (Resurrection in Korea, Growth of R.C. in Korea, 24- 26~27, 1969.7.9).

25) 골롬반회는 서울에서 처음으로 돈암동(1955년)과 왕십리(1959년)에 2개의 본당을 세웠다. 1955년 10월 미군 병사들은 돈암동 본당의 신축비용 대부분을 기부하였는데, 골롬반회 사제들이 한국전쟁기 통역 등으로 미군을 도와주었기 때문에, ‘골롬반회 신부님들께 진 빚을 갚을 뿐’이라고 하였다. 최선혜, 「성골롬반 외방선교회와 춘천교구」, 조현범 외, 『한국 천주교회사의 빛과 그림자-敦史 趙珖교수 정년기념 논총』, 천주교 호남교회사연구소, 2010. 380쪽.

26) 「골롬반문서」, 1-63 (1983.11.23).

27) 1983년 5월 골롬반회 사제들의 철수로 원주교구는 한국인 사제만으로 구성된 최초의 교구가 되었다.

28) 한국전쟁 때 납북되었다가 퀸란 주교와 함께 생존하여 돌아온 크로스비(Philip Crosbie) 신부가 1988년 11월 12일 본국인 호주로 귀국함으로써 골롬반회 사제가 공식적으로 춘천교구에서 철수하였다.

29) 「골롬반문서」, 1-44~45 (1979.3.5).

30) 위의 문서, 26 ( Region of Korea: News Letters 20 Issues, 26-29~40, 1986.10/11).

 

[교회와 역사, 2024년 9월호, 글 김정현 미카엘라(한국교회사연구소 특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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