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5월 29일 (금)
(홍)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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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욱현 신부님_김건태 신부님_이병우 신부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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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석 [wsjesus] 쪽지 캡슐

2026-05-28 ㅣ No.189827

조욱현 신부님_“제 눈을 뜨게 해주십시오.”

 

바르티매오는 길가에 앉아 있던 눈먼 걸인이었다.

 

 그는 단순한 개인이 아니라, 타락한 인류의 실존적 처지를 상징한다. 죄와 무지로 인해 하느님을 보지 못하고 길가에 방치된 채 앉아 있는 모습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바르티매오의 눈먼 상태는 영혼의 눈이 가려져 진리를 보지 못하는 인간을 상징한다.”라고 말한다. 즉, 그는 우리 자신이며, 회개 이전의 인류 전체이다.

 

바르티매오는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 고백한다. 

 

이는 단순한 치유자가 아니라, 메시아에 대한 신앙 고백이다. 군중은 그를 꾸짖지만, 그는 더 크게 외친다. 여기서 우리는 깨닫는다. 믿음은 군중의 시선이나 세상의 방해를 넘어서는 끈질긴 외침이다. 은총은 소극적 기다림이 아니라, 주님을 향한 용기 있는 부르짖음을 요구한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말한다. “믿음은 단순히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아는 것이 아니라, 군중이 막아도 그분께 나아가려는 용기 있는 행위다.”

 

바르티매오는 예수님을 향해 달려가면서 겉옷을 벗어 던졌다. 

 

이는 단순한 동작이 아니라, 옛 인간을 버리는 상징적 행위다.(에페 4,22 참조) 그가 의지하던 마지막 재산, 삶의 안전망까지 버리고, 전적으로 예수님께 자신을 맡긴 것이다. 이는 제자가 되려면 반드시 “버려야 할 것”이 있음을 알려준다. 단순히 재물만이 아니라, 우리의 교만, 집착, 과거의 상처와 죄의 습관까지도 내려놓아야 한다.

 

예수님의 질문에 바르티매오는 구체적으로 대답한다.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51절) 이 기도 안에는 구체적인 믿음과 간절한 갈망이 담겨 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기도 역시 모호하거나 추상적인 바람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인격적인 간청이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은 바르티매오를 치유하시며, 단순히 육체의 시력 회복만이 아니라, 영혼의 구원을 선언하신다. 

 

그리고 그는 곧바로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다.”(52절) 이것이 참된 제자직의 모습이다. 은총은 단순한 치유에서 끝나지 않고, 주님을 따르는 삶으로 이어져야 한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회칙, “Spe Salvi”(희망으로 구원된 우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신앙은 단순한 시각 회복이 아니라, 세상을 그리스도의 빛 안에서 새롭게 보는 것이다.”(31항 요약)

 

우리는 군중의 목소리보다 주님의 부르심에 귀 기울이는가? 

 

신앙의 여정에서 버리지 못한 ‘겉옷’, 곧 나를 가로막는 집착과 죄악은 무엇인가? 은총을 받았다면, 그 자리에서 멈추지 않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오늘 복음은 단순한 치유 이야기가 아니라, 제자직의 여정을 비추는 영적 거울이다. 바르티매오처럼 끈질기게 외치고, 옛 옷을 벗어 던지고, 주님을 따르는 길이 곧 우리에게 주어진 성소다.

 

바르티매오는 길가에 앉아 있던 눈먼 걸인이었다. 

 

그는 단순한 개인이 아니라, 타락한 인류의 실존적 처지를 상징한다. 죄와 무지로 인해 하느님을 보지 못하고 길가에 방치된 채 앉아 있는 모습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바르티매오의 눈먼 상태는 영혼의 눈이 가려져 진리를 보지 못하는 인간을 상징한다.”라고 말한다. 즉, 그는 우리 자신이며, 회개 이전의 인류 전체이다.

 

바르티매오는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 고백한다. 

 

이는 단순한 치유자가 아니라, 메시아에 대한 신앙 고백이다. 군중은 그를 꾸짖지만, 그는 더 크게 외친다. 여기서 우리는 깨닫는다. 믿음은 군중의 시선이나 세상의 방해를 넘어서는 끈질긴 외침이다. 은총은 소극적 기다림이 아니라, 주님을 향한 용기 있는 부르짖음을 요구한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말한다. “믿음은 단순히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아는 것이 아니라, 군중이 막아도 그분께 나아가려는 용기 있는 행위다.”

 

바르티매오는 예수님을 향해 달려가면서 겉옷을 벗어 던졌다. 이는 단순한 동작이 아니라, 옛 인간을 버리는 상징적 행위다.(에페 4,22 참조) 그가 의지하던 마지막 재산, 삶의 안전망까지 버리고, 전적으로 예수님께 자신을 맡긴 것이다. 이는 제자가 되려면 반드시 “버려야 할 것”이 있음을 알려준다. 단순히 재물만이 아니라, 우리의 교만, 집착, 과거의 상처와 죄의 습관까지도 내려놓아야 한다.

 

예수님의 질문에 바르티매오는 구체적으로 대답한다.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51절) 이 기도 안에는 구체적인 믿음과 간절한 갈망이 담겨 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기도 역시 모호하거나 추상적인 바람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인격적인 간청이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은 바르티매오를 치유하시며, 단순히 육체의 시력 회복만이 아니라, 영혼의 구원을 선언하신다. 

그리고 그는 곧바로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다.”(52절) 이것이 참된 제자직의 모습이다. 은총은 단순한 치유에서 끝나지 않고, 주님을 따르는 삶으로 이어져야 한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회칙, “Spe Salvi”(희망으로 구원된 우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신앙은 단순한 시각 회복이 아니라, 세상을 그리스도의 빛 안에서 새롭게 보는 것이다.”(31항 요약)

 

우리는 군중의 목소리보다 주님의 부르심에 귀 기울이는가? 신앙의 여정에서 버리지 못한 ‘겉옷’, 곧 나를 가로막는 집착과 죄악은 무엇인가? 은총을 받았다면, 그 자리에서 멈추지 않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오늘 복음은 단순한 치유 이야기가 아니라, 제자직의 여정을 비추는 영적 거울이다. 바르티매오처럼 끈질기게 외치고, 옛 옷을 벗어 던지고, 주님을 따르는 길이 곧 우리에게 주어진 성소다.

 

김건태 신부님_“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오늘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의 마지막 길, 예리코를 떠나시려 합니다. 앞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운명에 대하여 세 번에 걸쳐 예고를 하셨으나, 제자들은 아직 무슨 의미인지 깨닫지 못한 상태, 눈이 먼 사람처럼 아직 제대로 보지 못하는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복음저자 마르코처럼 마태오와 루카도 이 동일한 이야기를 예수님과 제자들의 예루살렘 입성 직전에 배치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의미하는 바가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구원의 절정인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만큼은 마음의 눈을 제대로 떠서 보고 확인하고 증언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예리코 성문 가까이에서 구걸하던 걸인들, 그들 가운데 한 눈먼 사람,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가, 파스카 축제를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향하던 순례자들을 기다리고 있던 터에, 다른 사람들보다 강렬한 느낌을 받아 무엇인가 예측하지 못한 일이 벌어지리라 예감합니다.

 

눈먼 이는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는 소리를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치기 시작합니다.” 군중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업적을 드러내시는 장면은 목격했으나, 그분의 진정한 신원은 알아보지 못하고서, 그저 “나자렛 사람 예수님” 정도로 알아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눈먼 이는 좀 더 멀리 보고자 합니다. 하느님의 영이 이 사람의 마음속에 진리를 불어넣어 주자, 믿어 고백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님!” 이 눈먼 이는 오셔야 할 분이 ‘다윗의 자손 예수 메시아님’이심을 선포하며 외칩니다: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사람들은 이 사람을 잠자코 있게 하려 하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더욱 아름다운 소리로 외칩니다.

 

늘 성령의 움직임을 의식하고 있던 예수님은 군중의 함성 속에 묻힐 뻔했던 눈먼 이의 외침을 들으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메시아로 지칭됨을 더는 마다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이제 메시아로 처신하시며, “그를 불러오라고 분부하십니다.”

 

예수님은 그의 신앙을 점검하고자 질문을 던지시나, 이 질문은 당신께 무엇인가를 요구할 수 있는 자격과 권리를 사람에게 넘겨주심을 전제로 합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눈먼 이는 망설임 없이 유일하며 간절한 바람인 치유를 소리 높입니다: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치유 요청에 대한 예수님의 응답은 불가피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청하는 사람에게 주실 것이며, 눈먼 이들을 보게 하려고 이 세상에 오셨음을 여러 차례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가거라.” 눈먼 이는 육체적인 치유만을 요구했지만, 예수님은 영적인 치유까지 선사해주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눈먼 이의 치유 이야기는, 문자 그대로의 육체적 치유를 넘어, 보지 않고 살거나 눈을 감고 보지 않으려 했던 예수님의 제자들, 초대교회 신자들, 그리고 우리의 부족한 신앙 삶을 치유해주는 이야기로 다가옵니다. 부족을 느낄 때마다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시기를” 청하는 용기와, 치유의 은총과 함께 “따르는” 자세가 필요할 뿐입니다.

 

오늘 하루, 청하는 우리의 기도를 기꺼이 들어 주시고, 부족한 가운데서도 정성을 다하여 따를 수 있도록 늘 이끌어주시는 주님께 감사드리며, 주님을 믿고 따르는 신앙인임을 자랑스럽게 드러내는, 보람찬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이병우 신부님_"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마르10,51ㄴ)

 

'믿음과 비움!'

 

오늘 복음(마르10,46ㄴ-52)은 '예수님께서 예리코에서 눈먼 이를 고치시는 말씀'입니다.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예리코에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가 예수님께 소리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마르10,47) 사람들이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자, 그는 더욱 큰 소리로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마르10,48)

 

눈먼 거지의 이 외침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십니다. 그리고 그와의 대화를 시작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마르10,51ㄱ)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마르10,51ㄴ)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르50,52ㄱ)

예수님의 이 말씀으로 눈먼 거지가 다시 보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섭니다.

 

'은총를 받고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서는 이의 모습을 묵상해 봅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늘 우리를 향해 있습니다.

비가 온 대지를 적시듯,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은총도 그러합니다. 그런데 이 은총을 받는 사람이 있고, 못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느님은 주시는데, 우리가 받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은총을 주시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이고, 또 하나의 이유는 '육적인 것들로', 곧 '교만과 탐욕과 인색과 시기와 음욕과 분노와 게으름의 우산으로' 그 은총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을 먹고 자라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한 믿음'이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성령의 힘으로 내 안에 있는 육적인 것들을 비우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갓난아이처럼 영적이고 순수한 젖을 갈망하십시오. 그러면 그것으로 자라나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1베드2,2)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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