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6일 (금)
(백) 부활 제4주간 금요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우리들의 묵상ㅣ체험 우리들의 묵상 ㅣ 신앙체험 ㅣ 묵주기도 통합게시판 입니다.

(부록) 70주간(이레)

스크랩 인쇄

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21-11-24 ㅣ No.151188

 

(부록) 70주간(이레)

 

(다니9:1-2, 24~27)

1 메다 족속 출신 아하스에로스의 아들 다리우스가 바빌론의 임금이 되던 해였다. 2 다리우스 제일 년에 나 다니엘은 성서를 읽다가 야훼께서 예언자 예레미야에게 하신 말씀에서 예루살렘이 돌무더기로 남아 있을 햇수가 칠십 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24 하느님께서는 정하신 기간이 *칠십 주간(이레)이 지나야 네 겨레와 네 거룩한 도읍으로 하여금 다시는 거역하지 않게 하시고 죄악에서 손을 떼게 하실 것이다. 죄를 벗겨 주시고 영원한 정의를 펴실 것이다. 환상으로 내리신 예언을 틀림없이 이루시어 더없이 거룩한 이에게 기름을 부어 그를 성별하여 세우실 것이다. 25 너는 똑똑히 알아라. 너희가 돌아 가 예루살렘을 재건하리라는 말씀이 계신 때부터 기름부어 세운 영도자가 오기까지는 *칠 주간이 흐를 것이다. 그 뒤에 *육십 이 주간 어려운 시대가 계속되겠지만, 그 동안에 성을 쌓고 재건하게 될 것이다. 26 이렇게 육십 이 주간이 지난 다음, *기름부어 세운 이가 재판도 받지 않고 암살당하며, 도읍과 성소는 한 장군이 이끄는 침략군에게 헐릴 것이다. 전쟁으로 끝장이 나 폐허가 되고 말 것이다. 종말이 홍수처럼 닥쳐 올 것이다. 27 그 장군은 한 주간 동안 무리를 모아 날뛸 것이다. 반 주간이 지나면 희생 제사와 곡식 예물 봉헌을 중지시키고 성소 한 쪽에 파괴자의 우상을 세울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 파괴자도 예정된 벌을 받고 말리라.'

 

지금 이 말씀은 이스라엘이 바벨론으로 끌려가 70년간의 포로 생활을 할 당시 천사 가브리엘로부터 다니엘에게 주어졌던 계시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왜 70년간 포로 생활을 해야 했습니까?

 

(레위26:27-35) 27 이렇게 해도 너희가 내 말을 듣지 않고 반항한다면 28 나는 크게 노하여 너희와 맞설 것이며 너희 죄를 *일곱 배로 징계하리라. 29 그리하여 너희는 너희 아들들의 살을 먹고 딸들의 살을 먹어야 하게 되리라. 30 나는 언덕에 있는 너희의 산당을 헐어 버리고, 분향단을 찍어 버리리라. 시체처럼 쓰러진 너희 우상들 위에 너희의 주검이 쌓이게 하고 다시는 눈길도 돌리지 아니하리라. 31 너희 성읍들을 폐허로 만들고 너희 성소들을 쑥밭으로 만들 것이며 너희가 나를 기쁘게 하려고 피우는 향기를 역겨워하며 코도 돌리지 아니하리라. 32 내가 너희의 땅을 쑥밭으로 만들리니 너희 원수들이 그리로 살러 왔다가는 너희가 망하는 꼴을 보고 놀랄 것이다. 33 나는 칼을 빼들고 너희를 쫓아 이민족들 사이에 흩어 버리리라. 마침내 너희 땅은 쑥밭이 되고 너희 성읍들은 폐허가 되리라. 34 너희가 원수의 땅에 끌려 가면 너희의 땅은 쑥밭이 되리라. 그 동안에 땅은 안식을 누릴 것이다. 그제야 숨을 돌리며 제 *안식을 누릴 것이다. 35 너희가 여기에 사는 동안 *안식년에도 쉬지 못하던 땅이 쑥밭이 되어 있는 동안에 *쉬게 되리라.

 

이게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게 된 이유입니다. 왜죠?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말씀을 청종치 않고 대항했기 때문이랍니다. 

그런데 34절과 35절을 보면,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말씀에 대항한 것이, 땅을 쉬게 하지 않은 것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은 땅을 지키시기 위해 인간들을 땅에서 쫓아내 버리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땅은 하느님의 약속이 담긴 땅입니다.

땅을 지키시겠다는 하느님의 의지는 당신의 약속을 향한 하느님의 집착의 다른 표현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약속을 모르는 자들은 절대로 그 약속의 땅에 들여보내지 않으시겠다는 하느님의 결연한 의지가 이스라엘의 바벨론 유배 사건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약속의 땅이 담고 있는 내용은 천수답 농지의 모습이었습니다. 애굽에서는 자기들이 채소와 초목에 물을 대어서 자기들의 수고로 소산을 내어야 했지만 약속의 땅에서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이른 비와 늦은 비에만 의존하여 소산을 얻을 수 있습니다. 

쉬운 말로 약속의 땅은 인간들의 수고와 노력이 가입하여 소산에 영향을 줄 수 없는 땅이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판관시대 340년, 그리고 사울 왕에서 부터 시드키야까지의 이스라엘 왕조 460년, 도합 800년간을 하느님의 은혜가 아닌 자신들의 힘만을 의지하여 살았습니다. 

판관시대에는 하느님을 왕 취급하지 않고 ‘왕이 없으므로’라는 변명을 앞세워 자기네들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았고, 왕조 시대에는 왕조시대대로 자기들의 종교행위와 열심을 근거로 하느님의 은혜를 무시하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바벨론 포로로 내 보내 버리신 것입니다.

그런데 다니엘서 9장 1절과 2절을 보면 그 70년 포로 생활이 이미 예레미야의 서책에 기록이 되어 있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70년 포로 생활이 하느님의 언약에 의해 이미 결정이 되어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의 애굽 종살이가 아브라함 때 이미 언약이 되었던 것과 같은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은 그 70년이 지나면 바벨론에게서 풀려나 자유의 몸이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이야기를 천사 가브리엘이 어떻게 풀어주는가 하면 70주간(이레)으로 풀어 줍니다. 그 내용을 잘 보면 70이레(주간)가 지나면 ‘이상과 예언이 이루어지는 시기’가 온다고 합니다. 

그 말은 하느님의 언약이 완성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때가 바로 종말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때가 언제인가 하면 하나님의 거룩한 자가 기름 부음을 받을 때입니다.

 

(다니9:24) 24 하느님께서는 정하신 기간이 *칠십 주간이 지나야 네 겨레와 네 거룩한 도읍으로 하여금 다시는 거역하지 않게 하시고 죄악에서 손을 떼게 하실 것이다. 죄를 벗겨 주시고 영원한 정의를 펴실 것이다. 환상으로 내리신 예언을 틀림없이 이루시어 더없이 거룩한 이에게 *기름을 부어 그를 성별하여 세우실 것이다.

 

이 구절이 70주간(이레)을 푸는 아주 중요한 키가 되는 구절입니다.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는다는 말은 거룩한 자가 왕으로 등극을 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 기름부 음은 성령이 부어지는 것으로 설명이 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거룩한 자가 기름 부음을 받는 때가 언제입니까? 예수님 머리 위로 성령이 임하시는 장면이 예수님께서 세례자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시는 장면에서 나오지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는 그 시점이 바로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는 때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때에 이스라엘의 왕으로 공식적인 일을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공생애를 시작하시는데 하늘로부터 성령이 부어짐으로 말미암아 그 분의 왕 되심이 밝히 증명이 되는 그 장면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서 확실하게 그 의미를 펼쳐내어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시는데 무엇을 타고 들어가시지요? 새끼 나귀를 타고 들어가십니다. 그건 즈가랴서에서 예언이 되었던 것입니다.

 

(즈가랴9:9) 9 수도 시온아, 한껏 기뻐하여라. 수도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보아라, 네 임금이 너를 찾아 오신다. 정의를 세워 너를 찾아 오신다. 그는 겸비하여 나귀, 어린 새끼 나귀 를 타고 오시어

 

이 예언이 성취되는 곳이 요한복음 12장입니다.

 

(요한12:12-15) 12 명절을 지내러 와 있던 큰 군중은 그 이튿날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 오신다는 말을 듣고 13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예수를 맞으러 나가,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이스라엘의 왕 찬미 받으소서!' 하고 외쳤다. 14 예수께서는 새끼 나귀를 보시고 거기에 올라 앉으셨다. 이것은 성서에, 15 '시온의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 임금이 너에게로 오신다. 새끼 나귀를 타고 오신다' 하신 말씀 그대로였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시는 장면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새 예루살렘으로 회복시키시기 위해 들어가시는 장면인 것입니다. 그게 다니엘서 9장의 70주간에 나오는 거룩한 성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십니다. 예루살렘 성은 거룩한 성. 그런데 그 성은 하느님의 저주 속에 들어 있는 성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예루살렘은 하느님의 거룩한 성이 힘의 세계의 총화라 할 수 있는 이방의 로마에게 점령 당해 있는 상태입니다. 그 상태를 타락이라고도 하고 흑암이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다니엘 시대에는 거룩한 성이 바벨론에게 훼파당한 상태입니다. 그 상태를 다니엘이 이렇게 묘사를 합니다.

 

(다니9:16) 16 그러나 주께서는 자비로우시니, 거룩한 산 위의 예루살렘성에 내리시던 노여움과 진노를 이제 거두어 주십시오. 우리의 잘못과 조상들의 죄 탓으로 예루살렘이나 하느님의 백성이 모든 이웃 백성들에게 욕을 당하고 있습니다.

 

보세요. 지금 다니엘이 거룩한 성 예루살렘,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고 있지요? 마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하시면서 예루살렘을 위해 기도하시는 모습과 흡사합니다. 

그러니까 다니엘은 지금 거룩한 성을 회복하러 오시는 예수님의 모형으로, 하느님의 계시를 풀고 있는 것입니다.

 

(다니9:22~24) 22 이렇게 분명히 일러 주는 것이었다. '다니엘아, 네가 알려고 하는 것을 깨우쳐 주려고 이렇게 왔다. 23 네가 간절한 기도를 올리자 곧 대답이 내렸는데 나는 그 대답을 일러 주러왔다. 하느님께서 너를 사랑하셔서 이렇게 대답해 주시는 것이니, 이 말씀을 잘 듣고 환상의 뜻을 깨닫도록 하여라. 24 하느님께서는 정하신 기간이 칠십 주간이 지나야 네 겨레와 네 거룩한 도읍으로 하여금 다시는 거역하지 않게 하시고 죄악에서 손을 떼게 하실 것이다. 죄를 벗겨 주시고 영원한 정의를 펴실 것이다. 환상으로 내리신 예언을 틀림없이 이루시어 더없이 거룩한 이에게 기름을 부어 그를 성별하여 세우실 것이다.

 

보세요. 하느님께서 다니엘에게 거룩한 성과 거룩한 백성들의 회복을 예언하시면서 ‘네 백성, 네 거룩한 성’이라는 말을 하십니다. 그리고 8장에서는 다니엘을 가리켜 인자라(다니8:17)하십니다. 그 인자라는 단어는 다니엘서 7장 13절 이하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던 단어였습니다.

그러니까 다니엘은 정확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모형하고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래서 다니엘이 이스라엘이 포로에서 풀려 날 때에도 바벨론에서 나오지 못하고 바벨론에서 죽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무너진 예루살렘 성의 중건 정도가 아닌, 하느님 백성들의 회복이라는 것을 계시를 통해 안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이 다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러 나갔을 때에 그는 나가지 않고 바벨론에서 죽은 것입니다. 그 모습은 요한묵시록에 그대로 나타납니다.

 

(묵시11:8~9) 8 그리고 그들의 시체는 그 큰 도성의 한길에 버려질 것입니다. 그 도성은 그들의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던 곳이며 상징적으로는 소돔이라고도 하고 에집트라고도 합니다. 9 여러 백성과 종족과 언어와 민족에 속한 사람들이 사흘 반 동안 그들의 시체를 구경할 것이며 그 시체가 무덤에 안장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두 증인, 즉 교회가 바벨론 성에서 죽지요? 그런데 그 곳에서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고 하십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십자가로 회복되기 전의 예루살렘 성은 바벨론입니다. 그 바벨론으로 하늘의 왕이 나귀를 타고 전쟁을 하러 들어가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브리엘의 계시는 그때에 죄악이 영속되며(영원히 속죄가 이루어짐) 영원한 義가 드러나며 이적과 예언이 이뤄지는 종말이 온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고 십자가를 지고 죽으신 후 부활하셔서 승천 하신 그 이후의 역사는 무엇이 되는 것입니까? 공중에 붕 뜨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점으로 역사를 끝내 버리셨다고 하시는데 이 역사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단 말입니다. 이걸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우선 70주간(이레)에 대해 개괄적인 이해를 좀 해야 합니다. 이레는 한 주간, 즉 7일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러니 70주간(이레) 하면 490(70☓7)일이 되겠지요? 그런데 예언서의 날짜 계산은 하루를 1년으로 계산을 합니다. 

따라서 천사 가브리엘의 예언은,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명령이 날 때부터 490년 이후에는 역사가 종결이 된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튼 490년, 70이레(주간)는 우리가 레위기 26장에서 확인한 것처럼 70년 포로 생활을 통한 7배의 징책 기간을 가리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느님께 대항했을 때 하느님께서 그들을 칠 배로 징책 하실 것이라 하시고 70년 포로 생활로 밀어 버리시잖아요? 그런데 천사 가브리엘이 그 70년 포로 생활을 70주간으로 다시 풀어 주고 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70년 포로 생활이 담고 있는 것이 이스라엘이 칠 배로 징책을 당하는 현장, 즉 죽도록 두들겨 맞는(벌이 칠 배)현장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70년 포로 생활은 70이레의 축소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70년 포로 생활이 왜 발생한 것이지요? 이스라엘에 약속의 땅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안식년은 물론이요, 희년도 지키지 않고 땅을 혹사 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70이레, 즉 이 인류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가 완료하신 약속의 실체를 모르는 자들이 세상 권세 잡은 자의 종으로 살면서 하느님을 대적하는 현장을 폭로 당하는 현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바벨론에 인자의 모형인 다니엘이 투입이 되고 그가 바벨론에서 죽고, 이스라엘이 풀려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라는 명령은 어느 때에 누구로부터 주어진 것입니까? 그것이 규명이 되어야 70이레의 시점을 알 수 있잖아요? 예루살렘 성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세 차례에 걸친 침공에 의해 완전히 불타서 폐허가 되었습니다.

바벨론의 1차 침공이 BC605년이었고 2차 침공이 BC597년입니다. 그리고 BC586년에 3차 침공을 하면서 예루살렘 성전과 예루살렘 성 전체를 완전히 초토와 시켜 버렸습니다. 그러다가 바벨론이 BC538년에 키루스에게 망합니다. 그 키루스의 나라가 메대와 페르시아입니다. 

그가 BC537년에 이스라엘을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내서 성전을 재건하게 합니다.

이 때 즈루빠벨과 예수아를 중심으로 약 5만 명이 귀환하여서 BC 516년에 성전이 재건됩니다. 그걸 즈루빠벨 성전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때에는 예루살렘 성이 재건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예루살렘 성이 재건이 되고 성전 예배가 다시 회복된 때는 BC457년 2차포로 귀환 때입니다. 그때의 페르시아 왕이 아르닥싸입니다. 성전은 키루스가 재건하라고 했고 성은 아닥사스다가 재건하라고 했습니다. 그게 에즈라서에 나옵니다.

 

(에즈라7:11~13) 11 에즈라는 사제면서 선비였다. 이스라엘이 야훼께 받은 계명과 법규를 통달한 선비였다. 그는 아르닥사싸 황제에게서 아래와 같은 칙령을 받았다. 12 '아르닥사싸 황제는 하늘을 내신 하느님의 법을 가르치는 선비 에즈라 사제에게 칙령을 내린다. 13 이에 짐은 아래와 같이 지시하는 바이다. 짐의 나라에 사는 이스라엘 백성으로서 사제든지 레위인이든지 예루살렘으로 가고 싶어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대와 함께 가도 좋다.

 

그렇지요? 이때가 바로 BC457년 아르닥싸 왕 7년 때인 것입니다. 다니엘서 9장의 70주간의 시작은 바로 여기입니다. 이때 예루살렘 성 재건이 시작되어서 정확하게 49년 뒤인 BC408년에 예루살렘 성이 완전히 재건이 됩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라는 명령이 떨어지고 난 뒤 49년 만에 거룩한 성이 완전히 재건이 되는 것입니다. 그 49년 동안 에즈라와 느헤미야 같은 예언자들에 의해 성전 예배와 율법 신앙이 회복이 됩니다. 그건 하나의 상징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성전 예배와 율법 신앙이 온전히 성취되어 은혜로 운영이 되는 나라인데 중간에 예수 그리스도가 빠져 버리고 외형상의 하느님 나라의 성취가 그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49년은 일곱주간이지요? 그렇다면 일곱주간(이레) 동안에 거룩한 성이 완전히 다 완성이 된다고 해야 맞는데 다니엘서 9장의 70주간이 예언에서는 일곱주간이 지나고 또 그 후로 62주간이 지나서 거룩한 성이 완성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다니9:25) 25 너는 똑똑히 알아라. 너희가 돌아가 예루살렘을 재건하리라는 말씀이 계신 때부터 기름부어 세운 영도자가 오기까지는 *칠 주간이 흐를 것이다. 그 뒤에 *육십이 주간 어려운 시대가 계속되겠지만, 그 동안에 성을 쌓고 재건하게 될 것이다.

 

잘 생각해 보세요. 예루살렘 성 재건 명령이 떨어지고 정확하게 일곱이레 만에 예루살렘 성이 재건이 되었습니다. 그건 기름부음 받은 왕,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이스라엘이라는 거룩한 성이 회복이 되는 구원이 이야기를 은유하고 있는 것이라 했지요? 

따라서 거룩한 성이 재건이 되는 일에는 반드시 기름 부은 왕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보세요. 역사 속에서는 예루살렘 성 재건이 일곱주간 동안에 일어났는데 계시 속에서는 일곱주간이 지나면 기름 부은 왕이 오실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62주간이 이어지는데 여기에서는 거꾸로, 62주간 동안에는 거룩한 성이 완성이 될 것이라는 계시가 나오는데 역사 속에서는 기름 부은 왕이 오셨다가 끊어지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렇지요? 이게 조금 힘들어요. 그러나 어렵지 않습니다. 잘 들어 보세요.

 

먼저 62주간 후에 정말 기름 부음 받은 왕이 오셨다가 끊어지셨는지 계산을 해 드리겠습니다. 일곱주간 동안에 역사 속에서 실제로 거룩한 성이 재건이 된 것이 BC408년이라고 했습니다. 그때부터 62주간이면 언제가 되는 것입니까? 62X7=434입니다. 

434에서 408을 빼면 26이지요? 그렇다면 주님은 스물여섯 살에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것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BC에서 AD로 넘어가는 기점이 예수님의 탄생을 기점으로 한 것이라고 우리는 알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예수님은 서른 살에 요한의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세례가 실제화된 것이 십자가였습니다. 세례라는 것 자체가 하느님의 뜻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니까요. 그 이전 존재가 죽고 새로운 존재로의 합일과 연합을 이루는 것을 세례라 합니다.

아무튼 그렇게 기름부음 받은 자는 AD26년에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70주간의 계산이 맞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서른 살에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길까요? 예수님은 BC4년에 태어나셔서 AD30년에 돌아가셨습니다. 그게 역사의 기록입니다. 

예수님을 죽이려 했던 헤롯 대왕이 BC2년에 죽었으니까 적어도 그 전에 태어나셨어야 했잖아요?

그리스도교가 로마의 국교가 된 후 AD526년에 로마 황제 유스틴이 수도사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에게 예수님 탄생을 기점으로 서력기원을 바꾸라고 명령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예수님이 태어나신 때보다 4년 뒤인 로마市 창건일을 기준으로 서력기원을 바꾸었습니다. 로마시민으로서 자존심이 상했던 것이었겠지요. 그래서 서력기원은 예수님이 태어나시고 4년 뒤를 기점으로 해서 출발을 합니다.

그러니까 BC4년에 태어나신 예수님께서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것이 AD26년이 맞는 것이고, 그 때가 예수님의 나이 서른이었을 때였던 것입니다. 소름끼치게 정확하지요?


그렇다면 이제 왜 기름부음 받은 자의 오심과 죽으심이 이렇게 혼동이 되게 기록이 되어 있는가에 대해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의 요르단강 세례는 죄인과 연합 되시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왕으로 오셔서 거룩한 성을 회복시키시는 일을 시작하는 시점에서 하느님에 의해 죽임을 당하시고 일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걸 역사와 묵시의 오버랩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역사 속의 예수님이 죽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물 위로 올라오셨을 때 성령이 임해버리지요? 그때 예수님은 성령으로 살아나신 것입니다. 

목수의 아들 예수는 죽고 하느님의 아들 메시아로서의 예수가 역사를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존재를 묵시적 존재라고 합니다. 역사를 살지만 역사와 관계없는 완료된 하느님 나라의 존재들을 묵시적 존재라고 합니다. 

그러한 예수님에게 역사적인 세월은 의미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이제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존재를 사도 바울로는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표현을 합니다.(고후5:17)

새로운 피조물은 10년 뒤에 죽어도 천국에 가고, 30년 뒤에 죽어도 천국에 가고, 100년 뒤에 죽어도 천국에 가고, 오늘 죽어도 천국에 갑니다. 그의 결국은 이미 묵시 속에 완료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로가 삼층 천에 올라가서 거기에 이미 완료 상태로 존재하는 자신을 보았습니다. 그러자 그의 인생과 역사가 묵시 속으로 들어가 의미와 가치를 잃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후부터 역사 속에서 그가 당하는 고난에 의연했고 세상의 무시와 멸시와 천대에도 초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이스라엘의 왕으로 일을 시작하심으로 이스라엘을 진짜 거룩한 성으로 회복시켜 내시는 그 사건과,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과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모두 묵시 속에서 한 경점으로 묶이게 되는 것입니다.

내용이 같은 사건들이 역사 속에서 시간 차를 두고 일어났지만.... 그때는 이미 묵시 속의 한 주간(이레)이기 때문에 그 사건들이 전부 하나로 묶여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름부음 받은 자의 오심과 죽으심이 혼돈 스럽게 기록이 되어 있는 것이고 그것이 거룩한 성의 재건과 혼용 되어 쓰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로마를 이 세상 마지막 나라로 표기를 하는 것입니다.

 

다니엘서 2장에 보면 뜨인 돌이신 예수에 의해 완전히 박살이 나는 신상에 대한 해석이 나오지요? 느부갓네살의 꿈 말입니다. 그것은 바벨론 페르시아 알렉산더 제국과 로마 제국에 대한 계시임과 동시에 종말에 대한 계시입니다. 

다니엘서 7장의 네 짐승에 대한 환상, 사자, 곰, 표범, 열 뿔 달린 짐승 역시 네 나라에 대한 계시입니다. 거기에서 공히 마지막 종말을 장식하는 나라가 로마입니다.

예수께서 바로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있는 로마로 나귀 새끼를 타고 들어 가셔서, 뜨인 돌로서 로마를 부수시는 것으로 역사가 종결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새 언약 아래에서의 묵시의 세계가 열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종결된 역사를 묵시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므로 이 역사 속에서의 그 어떤 가치 있는 행위나 업적도 전부 가치와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역사 속에서 모든 것들은 이제 하느님의 창세전 언약, 하느님의 은혜와 능력을 드러내는 도구에 불과할 뿐인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쉬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육일동안 창조를 하시고 칠일 째에 안식을 하셨지요? 그 안식의 날인 칠일 째 까지가 천지창조의 완성 지점입니다. 그건 하나의 모형이라고 했지요? 

혼돈과 공허와 흑암뿐인 죽음의 땅이 생기라는 하느님의 은혜의 단비에 의해 하느님이 居하시는 處所인 거룩한 성이 되는 창세전 언약이 성취되는 그림자인 것입니다.

다니엘서의 처음 일곱주간이 바로 그 창조의 수, 칠을 품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새 창조가 그렇게 안식으로, 다른 말로 하느님의 제자리 회복으로 끝나게 될 것인데 그것이 칠이라는 상징적 기간 안에서 완료가 될 것이라는 말인 것입니다. 

래서 이 역사의 주기가 7이라는 숫자를 주기로 하여 순환되는 것입니다. 그건 시간과 세월이 아무리 많이 흐른다 할지라도 그 모든 것은 다 하느님의 새 창조의 영역 안에 있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기름 부음 받은 자, 즉 메시아에 의해서 성취가 될 것임을 첫 일곱 주간에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이어지는 62주간에서도 또 기름 부음 받은 자가 등장하고 그의 죽음이 기술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62주간은 첫 일곱 주간을 역사 속에서 설명해 주는 기간이 되는 것입니다. 7주간과 62주간은 똑같은 내용을 품고 있는 것인데 그것이 역사 속에서 풀려 재현이 되는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BC408년에 실제로 역사 속에서 예루살렘 성이 재건이 되었습니다. 그 일은 다니엘이라는 인자의 모형이 바벨론에서 죽는 것으로 성취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는 성전 제사와 율법 신앙이 강화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기간 400년을 이스라엘의 암흑기라 부릅니다. 말라기를 끝으로 이스라엘에 하느님의 계시가 떨어지지 않는 시기입니다.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이 율법 신앙으로, 성전 제사로 돌아가게 되면 그 끝은 죽음이며 암흑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 제사와 율법 신앙이 강화된 그 시기를 암흑으로 덮어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 암흑의 이스라엘에 빛이신 예수가 오셔서 거룩한 성인 이스라엘을 십자가로 회복시켜 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이 ‘어두움에 빛이 오셨는데 어두움이 빛을 알아보지 못했다’로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62주간입니다.

그러니까 7주간은 62주간이 모형화 되어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고 62주간은 그 7주간을 역사 속에서 펼쳐 낸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전체를 품어 안고 있는 것이 마지막 한 주간인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쉽습니다. 7주간 안에 모든 역사가 다 들어 있는 것이고, 62주간 속에도 역시 모든 역사가 다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전체가 마지막 한 주간, 즉 묵시 속에서 완료가 되어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70주간인 것입니다. 

다니엘서 9장으로 돌아가 보면 그 마지막 한 이레 동안에 어떤 일이 생길 것이라고 하지요?

 

(다니9:26-27) 26 이렇게 육십이 주간이 지난 다음, 기름부어 세운 이가 재판도 받지 않고 암살당하며, 도읍과 성소는 한 장군이 이끄는 침략군에게 헐릴 것이다. 전쟁으로 끝장이 나 폐허가 되고 말 것이다. 종말이 홍수처럼 닥쳐 올 것이다. 27 그 장군은 주간 동안 무리를 모아 날뛸 것이다. *반 주간이 지나면 희생 제사와 곡식 예물 봉헌을 중지시키고 성소 한 쪽에 파괴자의 우상을 세울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 파괴자도 *예정된 벌을 받고 말리라.'

 

마지막 한 주간 바로 전에 기름부음 받은 이가 죽습니다. 그리고는 한 장군(왕)이 오는데 그 왕은 성읍을 파괴하여 전쟁을 하는 왕입니다. 심판의 왕이라는 뜻입니다. 누구일까요? 개혁주의는 여기에서 헛갈리고 있는 것입니다.

27절을 보면 다시 와서 전쟁을 일으키는 왕은 마지막 한 이레 동안 언약을 세우는데 그가 제사와 예물을 중지 시킵니다. 

즉 성전 제사와 율법신앙을 금지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언약입니까? 새 언약입니다. 새 언약은 하느님의 은혜에 의해 완료가 되는, 몸과 법이 하나가 되어 대상에게 전가가 되는 언약입니다.

따라서 그 언약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예수가 62주간 동안에 가짜 거룩한 성으로 발각이 된 이 세상의 율법주의와 유대주의와 싸운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왕에 의해 가짜 성읍이 완전히 박살이 납니다. 

그리고 그 장군(왕)은 마지막 날까지 성전 꼭대기에 흉물스러운 끔찍한 것을 세운다고 합니다. 그게 뭘까요? 가짜 거룩한 성의 가짜 종교 행위를 종말 때까지 공격하는 하느님의 아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아들은 가짜 교회들에게 흉물스러운 괴물로 여겨지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의 인본주의적 종교 행위와 바리새적인 위선들을 공격할 것이니까요.

물론 그 이야기는 역사 속에서 로마의 황제와 로마의 군대로 역사화 되어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그 기간은 묵시의 기간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그 역사 속에서 묵시를 읽어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생애 동안에도 한 번 모형으로 나타났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을 다 쓸어버리시고,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짓겠다.’고 하셨지요? 그 이야기입니다. 율법주의, 유대주의는 암흑이라는 것입니다. 그건 다 파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한 이레 동안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한 이레 동안 이 세상의 인본주의가 하느님에 의해 공격을 당하게 되고 이 세상의 성, 즉 이 세상 땅이 하느님의 아들에 의해 훼파될 것이라면, 그 한 주간 동안 이 세상이 어떤 상태로 던져지겠습니까? 고난으로 던져져야 맞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한 주간을 7년 대환난이라고도 하는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환난 속에서 묵시 속의 왕의 나라로 편입이 된 자들이 천년 왕국을 산다고도 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죠? 묵시의 세계는 시간 밖의 세계잖아요? 그래서 주님이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곳이라고 하신 거거든요? 

거기에서 천년이 영원, 즉 묵시의 영역입니다. 창세전이라는 말과 같은 말인 것입니다. 그 창세전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이미 준비되었고 정해졌습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은 아담 때부터 시작하여 전부 일곱 이레와 62주간을 설명하는 모형의 나라라고 보면 됩니다. 왜 그 묵시의 세계 속의 존재들이 천년 왕국을 역사 속에서 살게 된다고 말을 하는지 아시겠지요?

그러므로 그 마지막 한 주간을 사는, 묵시와 역사를 동시에 사는 성도는 이 역사 속에서 무엇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들의 행위, 즉 율법주의와 유대주의와 인본주의를 공격당하면서 예수만 믿는 자로 부수어져 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어찌 찬송을 안 할 수가 있겠습니까?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758 1

추천 반대(0) 신고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